2011 꿈세계와 이미지의 실현 – 정소연의 <홀마크 프로젝트> _ 강수미(미학)

꿈세계와 이미지의 실현 – 정소연의 <홀마크 프로젝트>

강수미 (미학)

1. 도입

왜 아무 것도 없지 않고 이미지가 있었을까? 매체이론가 빌렘 플루서(Vilém Flusser)는 인류의 문화사를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정리한다. “우선 시공간으로부터 조각품의 세계가, 예컨대 ‘비너스’의 세계가 추상되고, 이로부터 그림의 세계가, 예컨대 동굴 그림의 세계가 추상되며, 이로부터 다시 텍스트의 세계가, 예컨대 메소포타미아 서사시의 세계가 추상되고, 마지막에는 이로부터 컴퓨터화된 세계가, 예컨대 전자계산기의 세계가 추상된다.” 1) 다시 말해, 인류는 상상력을 통해 주어진 실제 세계로부터 입체 조각을 만들어냈고, 그 다음에는 평면 회화를, 또 그 다음으로는 개념과 논리를 기반으로 한 텍스트의 세계를 창출했으며, 가장 최근의 역사로 따지면 비물질적이고 가상적인 디지털 세계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진보주의 역사관을 따르는 문화사 일반의 설명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사실 플루서는 그런 일반적인 관점을 뒤집기 위해 위와 같은 주장을 했다. 단적으로 말해 그에 따르면 위에 정리한 단계를 “실제로부터의 단계적인 후퇴”로 볼 것이 아니라, “역순”으로 따져서 “실제를 형성하기 위해 움직인” 과정쯤으로 이해해보자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까지도 플라톤의 모방론 때문에든 아니면 각자의 현실감 때문에든 실재와 이미지, 실제적인 것과 환영적인 것을 나누고, 전자가 언제나 후자에 선행하며 후자는 전자를 닮으려 해왔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플루서는 오히려 실제가 “도깨비 같은 것”이며, 환영적인 것 또는 이미지가 “가능성의 범주”인 실제를 만들어내기 위해 작동해왔다는 식으로 생각해 볼 것을 제안한다. 예컨대 인간은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를 통해서 4차원 공간을 지각 가능한 형태로 실현시켰고, 라스코 동굴벽화를 통해서 4차원 공간으로부터 깊이 없는 평면의 세계를 추상해냈다고 가정해보자.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 글의 서두에 제기한 질문, 즉 이미지가 왜 존재했는지에 대한 답은 ‘그것으로 실제를 창출하기 위해서’가 될 것이다. 또 다른 매체이론가인 레지 드브레(Régis Debray)가 답하듯 ‘필멸하는 인간의 운명을 대리하는 유령’으로서 이미지가 출현한 것이 아니라.
작가 정소연의 [홀마크 프로젝트 Hallmark Project]는 바로 위의 플루서가 가정한 내용을 참조할 때, 그 프로젝트의 발생 및 의도를 정교하게 읽어내고 좀 더 구조적인 차원에서 그 의의를 따져볼 수 있다. 나아가 그 프로젝트에 속하는 일련의 그림들에서 이미지 요소 및 잠재적 의미를 풍부하게 드러낼 가능성이 보인다. 화사하고 행복한 이미지로 넘쳐나는 정소연의 최근 그림들을 앞에 두고, 내가 이론적 논의로 다소 장황하게 서두를 연 것은 이 때문이다. 요컨대 정소연이 2009년에 시작한 [홀마크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회화 연작은 실재와 가상의 이분법적 관계를 꽤 직접적인 방식으로 역전시키는 미술이다. 그 역전은 이분법의 논리를 그대로 두고 단순히 양자 중 어느 쪽이 더 근원적이라거나 더 강력하다는 식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이분법의 선형성을 영점(zero degree)으로 돌리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나중에 보겠지만, 이 지점에서 플루서의 매체 미학적 사변이 도움이 된다. 즉 이미지/가상에 의해서 실제적인 것이 가능해진다는 그 관점.

2. 홀마크 카드와 홀마크 프로젝트

정소연의 [홀마크 프로젝트](이하 [홀마크])를 보기 위해서는 ‘홀마크’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많은 이들이 알겠지만 ‘홀마크(Hallmark)’는 1910년 창립된 미국의 제조회사로 가장 대표적이고 유명한 상품은 카드이다. 100년이 넘는 동안 전 세계 사람들의 각종 대소사를 기념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회사의 카드, 보다 정확히 말하면 수천 종류가 넘는 그 카드의 이미지가 바로 정소연의 <홀마크>가 주목한 핵심 대상이다. 또는 액면 그대로 작가가 자신의 그림에 베껴다 쓴 대상이다. 여기서 이미 독자들이 짐작했겠지만, 정소연의 [홀마크] ‘프로젝트’는 홀마크사가 만들어낸 각종 카드의 수많은 이미지들을 차용해서 단일한 화폭에 재배열시켜 그림을 그리는 일을 이른다. 예컨대 [홀마크 프로젝트-사랑]은 홀마크사가 제조한 카드 중 ‘사랑’이라는 카테고리에서 큐피드 ․ 하트 ․ 장미 ․ 신데렐라와 왕자님 도상 등을 잘라내 컴퓨터의 포토샵 프로그램에서 하나의 화면으로 재구성한 후 오일과 아크릴로 정교하게 다시 그린 것이다. 현대회화의 전개과정을 보건대, 정소연의 이와 같은 그림은 특별히 독창적/위반적인 것이 아니며,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의 대유행 이후 미학적으로도 이미 완벽하리만큼 승인된 태도의 미술이다. 1960년대 게르하르트 리히터(G. Richter)가 이미 잡지 사진 따위를 그대로 베껴 그려 대성공을 거뒀고, 비슷한 시기 앤디 워홀(A. Warhol)은 실크스크린을 사용해 그렇게 했으며, 시그마 폴케(S. Polke) 또한 신문 도판 등 대량 생산되는 인쇄물의 망점을 천위에 따라 그리며 명성을 얻지 않았는가. 또한 현재 제프 쿤스(J. Koons)나 데미언 허스트(D. Hirst) 같은 글로벌 스타작가에서부터 한국의 미술대학 학생들까지 용이하고 효과적으로 취하는 경로의 회화가 아닌가. 그것이 사실이고, 정소연의 [홀마크] 연작 그림 또한 형식상 그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위에 예시한 작가들이 모두 외관상 비슷해보여도 각자의 회화 논리 혹은 작업 개념을 갖고 있는 것처럼, 정소연 또한 특유의 작업 문맥을 갖추고 있다. 그 문맥은 자기 삶을 둘러싼 환경이 미국산 제품들로 풍요로웠고 쾌적했던 작가의 유년시절이라는 매우 사적이고 내밀한 차원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 사적이며 내밀한 작가의 체험이 꿈과 현실, 실제적인 것과 환영, 실현된 것과 잠재적인 것 등 인식론과 미학의 오랜 대(大)주제를 특이하게 파고든다. 덧붙여 그것은 자본주의적 충족과 상실, 그리고 보상이라는 문화비판적 담론까지 건드린다. 그 점에서 우리는 정소연의 [홀마크]를 개별화시켜 세심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정소연은 관련 작가노트에서 “홀마크 프로젝트는 꿈과 현실, 주입된 이미지와 실재에 관한 이야기”라고 규정했다. 작가의 이 말은 언뜻 평범한 문제제기로 들린다. 그러나 이 말을 홀마크사의 카드가 표상하거나 약속하는 기념 ―그것이 생일이나 결혼의 축하만이 아니라 공감이나 용기를 북돋는 취지의 것일지라도 2) ― 의 세계와, 우리의 구체적 일상에 대입해보자. 또 1970년대 한국사회 대부분의 서민 가정이 누릴 수 없고 가질 수 없었던 외국식 물질문명을 자연스러운 환경으로 흡입하며 자란 한 아이의 내면에 원초적 형상으로 자리 잡은 이미지와, 그것이 다만 국내 소수의 영역에 이식된 미국산 문화이자 의식하지 못한 사이 내게 “주입된” 취향과 감각임을 깨달을 수밖에 없게 된 어른의 현실 이미지를 그에 대응시켜보자. 그럴 경우 우리는 정소연의 말과 그녀의 [홀마크] 시리즈 작업이 이분법의 어느 한쪽이 아닌, 둘이 공존하며 서로가 다른 쪽의 세계를 형성하고 구축하는 데 본질적으로 깊게 작용하는 양상에 대한 이야기이자 이미지임을 알게 된다.
먼저 홀마크사의 카드는 사람들의 소망이나 기원을 원천으로 하고, 그것을 참조해 만드는 ‘사회적 상징물’이다. 이렇게 정의하면 소망과 기원은 현실적인 것이고, 홀마크 카드의 이미지는 가상적인 것이다. 그러나 앞서 예로 들었던 정소연의 [홀마크 프로젝트-사랑]에서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사랑이라 할지라도 그 사랑의 유일무이한 실체 또는 그에 상응하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기보다는 누구나가 알고 동의하며 쓰는 사랑의 아이콘을 보유하고 있을 뿐이다. 이 경우 오히려 홀마크사의 이미지가 현실적인 것이고, 인간의 감정은 비실체적인 것이며, 이를테면 사람들은 태어나자마자 주입되는 온갖 추상적 의미와 가시적 이미지들 덕분에 지금까지 현실 또는 실재를 습득하고 재구성해올 수 있었다고 말해야 한다. 덧붙여 홀마크사가 카드의 이미지를 디자인할 때 우리의 각종 문화를 참조한다는 점, 그리고 우리는 역으로 그 이미지를 통해 ‘가족’, ‘생일’, ‘용기’, ‘사랑’, ‘애도’, ‘위로’ 등 온갖 정체성, 사건, 감정의 표현 방식을 습득해왔고, 심지어 그 이미지가 그런 사태 자체였다는 점에 근거해 이미지와 현실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그 생각의 갈래가 어떠하든, 홀마크 카드와 현실이 이상과 같이 작용해왔다면, 둘은 위계적으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노골적이고 직접적으로 물고 물리는 관계를 유지해왔다는 판단이 적절하다.
정소연이 [홀마크]에서 작가의 주관적 상상력, 메시지, 표현력 등을 스스로 근절시킨 반면 기계적 프로세스처럼 건조하고 객관적인 과정(수집-인용-발췌-재조합-베끼기)을 따라 그림을 그렸던 것은 바로 위와 같은 점을 표상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그 프로젝트 중 [가족]에서 아들을 목말 태우고 해를 바라보는 아버지, [생일]의 케이크와 풍선, [웨딩]의 부케, [용기]의 스마일 맨 등등은 홀마크 카드의 도상인 동시에 우리의 머리와 감수성을 지배하는 각 대상들의 상징화되고 범주화된 이미지인데, 정소연의 그림은 다른 어떤 측면도 아닌 바로 그 두 세계의 동시성과 상호작용을 이미지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홀마크]에서 세계는 현실과 이미지라는 이론적 테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좀 더 우리의 흥미를 자극하는 [홀마크] 내부의 세계는 꿈세계와 그것이 상실된/부재하는 세계다. 홀마크사가 제안하는 각종 카드의 이미지는 그것이 가령 슬픔이나 실망 같은 부정적인 주제라 할지라도 모두 아름답다. 또 따사롭고 친근하며, 풍족하고 기쁨으로 충만한 상태를 보여준다. 이를테면 그 조그마한 카드의 세계는 부정성에 대항하는 꿈세계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꿈세계인 한, 현실은 아직 혹은 더 이상 그 꿈세계가 아닌 세계다. 애초부터 없었거나 잃어버린 세계. 정소연이라는 작가 개인의 경우에도 이 두 세계가 문제였다. 앞서 나는 1970년대 한국사회 대부분의 삶과 미국식 환경에서 자란 누군가의 삶을 언급했는데, 정소연의 유년기가 그 후자에 속한다. 자세히 언급할 수는 없지만, 정소연은 조부모 덕분에 어린 시절 미국식의 쾌적하고 안락한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특별한 환경과 그로부터 형성된 지각과 경험은 작가가 성장하면서 획일적이고 시끌벅적한 대한민국의 일상과 뒤섞이는 와중에 변하고, 그 흔적이 다만 원천을 알 수 없는 ‘고향’, ‘그리움’, ‘향수’로만 남는다. 이를테면 그것은 어느 때부턴가 정소연에게 상실한 꿈세계이자 부재하는 현실이 된 것이다. 그러나 드라마틱하게도 작가는 그 잃어버린 세계, 노스탤지어의 고향을 미국의 대형 홀마크 매장에서 발견한다. 정소연이 [홀마크]를 구상한 것은 그때부터이며, 그 프로젝트의 그림들이 홀마크 카드의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모방한 이유 또한 그와 같은 배경에서다. 사정이 이와 같다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점은 [홀마크]가 홀마크 카드 이미지를 차용함으로써 대중상품사회를 비판하고자 했다는 식의 분석을 넘어 그 둘이 얼마나 친연 관계에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유사한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지에 결부된다. 한쪽은 예술작품이고, 다른 한쪽은 상품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3. 선형적 과정 너머 조합의 장(場): 오, 이토록 완벽한 세계!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정소연의 [홀마크] 시리즈는 수집 ․ 인용 ․ 발췌 ․ 재배열 ․ 그대로 따라 그리기의 이미지 방법론을 통해 완성된다. 그런데 작가가 대량생산되는 유명 카드사의 이미지를 차용해 그린다고 해서 거기에 어떤 창작 규칙이나 예술적 제작 원리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져서는 곤란하다. 물론 [홀마크]는 이제까지 우리가 살폈던 것처럼 홀마크 카드가 양쪽으로 거느리고 있는 꿈과 부재의 세계, 실제에 대한 이미지적 참조와 실제를 실현하는 이미지적 역능이라는 구조적 ․ 작용적 측면에서 유사하다. 하지만 [홀마크]는 결정적으로 대량생산되지도 않고 기계로 찍어내는 것도 아닌, 회화를 전공하고 여태까지 영상 등 다양한 미디어로 창작 활동을 해온 작가가 새삼스럽게 캔버스와 물감을 매체로 써서 손으로 그린 유일무이한 그림들이다. 그 점에서 [홀마크]는 홀마크 카드와 다르다. 거기에는 아무리 작가가 기계적 생산방식을 모방하고, 자신의 주관성을 창작과정에서 배제시키려 해도 그럴 수 없는 차원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직관적으로 더 조화롭거나 시각적 효과가 뛰어난 구성(composition)을 추구하는 경향, 상징적 의미만이 아니라 색채나 톤 등 표현의 가시성에 무의식적으로 민감한 경향, 또는 붓질 습관이나 묘사력 수준 같은 것이 그리는 매순간에 물리적/심리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홀마크] 그림들에서 정소연은 명암법 ․ 그라데이션 효과 ․ 강약 및 여백 처리 ․ 시각적 착시 등 여태까지 수많은 화가들이 창안했고 구사해왔던 다양한 회화 기교 및 양식을 구사한다. 한 그림에 하나의 테크닉이나 스타일을 적용하는 식이 아니라 하나에 여러 것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콜라주 되는 양상이다. 예를 들어 [사랑 4]를 보면 큐피드의 몸은 르네상스시기 티치아노나 미켈란젤로의 인체 묘사법과 비슷하게 그려진 반면, 얼굴은 문구점에서 파는 스마일 스티커와 똑같은 문양 및 질감을 하고 있다. 또 커다란 꽃무늬가 화면 전체를 패턴으로 만들고 있는 것 같지만, 작가가 군데군데 공간을 비우거나 다른 형상을 중첩시켜 놓은 덕분에 평면에서 3차원 일루전이 발생한다. 그렇다고 해서 정소연이 회화의 본질을 찾기 위해 이와 같은 방식을 취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회화를 오늘에 이르기까지 구축하고 유지시켜왔던 표현의 관례, 수많은 회화 작품들을 통해서 실현된 이미지들의 역량,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경험/수용하면서 우리 안에 부지불식간에 형성된 지각과 취향 등이 정소연의 그림그리기에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여기서 또 한 번 플루서를 불러내는 것이 좋겠다. 말하자면 정소연의 [홀마크]는 비단 홀마크 카드 이미지뿐만 아니라, 보다 넓게는 이미지 일반에 의해 형성되고 실현된 우리 문화의 현실 및 우리 각자의 의식과 감각 실제를 예시하고 있다. 동시에 그것을 뒤집어 현실에 실재하는 것들(동서양의 명화에서부터 카드사의 인쇄 상품까지)이 젓줄을 대고 있는 가상적이거나 잠재적인 것들(당신과 나의 기호, 몽상, 꿈, 기억, 추억에서부터 역사의 사실 및 미래의 비전까지)을 얇고 평평한 표면 위에 현실화시키고 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작용은 선형적이지 않다. 홀마크사가 정교하게 ‘설계’한 엄청난 숫자의 카드 이미지는 [홀마크]의 요소들로 분산 배치되고, 표면 위에 표면을 쌓는 식으로 중첩된다. [홀마크]의 각 그림들에서 스타일과 테크닉 또한 ―아마도 정소연이 자신의 그림에 모방하기도 전에 홀마크 카드사의 디자이너가 여러 회화 작품들의 경향을 따라 했을― 모티프와 의미의 인과적 관계 때문에 선별되는 것이 아니다. 그 보다는 상이한 이미지들이 무작위적이고(randomly) 우연하게 조우하면서도 시각적이고 감성적인 차원에서 조화를 이룰 수만 있다면 자유롭게 채택된다. 이는 단적으로 예컨대 홀마크사의 “Sympathy” 항목 카드와 정소연의 [홀마크 프로젝트-공감]을 함께 보면 드러나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즈음에서 우리는 정소연의 [홀마크]가 선형적 과정을 벗어나 일종의 조합의 장(field)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거기서 체계적인 줄은 자유분방한 요소들로 붕괴한다. 인과의 선은 시작, 과정, 그리고 결과를 직선적으로 연결한다는 점에서 ‘선형적 과정’이다. 그러나 그러한 인과적 관계가 적용되지 않는 곳/상황/사건의 경우, 혹은 개별 요소들이 상하관계나 종속관계가 아니라 독립적인 상태에서 공존하는 경우에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델은 각각의 것들이 ‘조합되는 장’이다. 나는 정소연의 최근 [홀마크] 그림들이 바로 그 같은 장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이질적이거나 유사한 것들이 요소들로 조합돼 상징적 의미로든 시각적 체험으로든 완벽함을 선물하는 장. 상실했든 애초에 없었든 현재는 허구이고 환영인 세계, 그 허구성과 환영성의 세계를 이미지로 보상하는 장. 불완전한 현실에서 완벽함이란 절대로 거짓이고 논리적 모순이지만, 인간사의 모든 지점들을 완벽히 범주화하고 촘촘하게 이미지로 구현하려는 홀마크사의 상품세계를 3) 명시적으로 모방함으로써 결여를 메우는 장. 그것이 정소연의 [홀마크]가 이미지로부터 구축한 실제적 공간/평평한 표면이다.

1) Vilém Flusser, Lob der Oberflächlichkeit, 김성재 역, 『피상성 예찬』, 서울: 커뮤니케이션북스, 2004, pp. 2-3.
2) 참고로 2011년 9월 현재 미국 홀마크사는 “실직을 위로하는 카드”를 새로 출시했다.
3) 홀마크사가 자사 웹 사이트에 공개한 “Ideas”를 읽어보면 우리는 그 상품세계가 얼마나 정교한 감성과 커뮤니케이션 기술로 소비자에게 침투하는지 알 수 있다. http://www.hallmark.com/online/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적 폭리를 위해 착취하기에는 너무 하찮은 욕망이나 타락이라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진단한 슬라보예 지젝의 판단은 정확하다. Slavoj Žižek, The Ticklish Subject, 이성민 역, 『까다로운 주체』, 서울: b, 2008, p. 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