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정소연의 네버랜드(Neverland) _ 미술평론가 류병학

정소연의 네버랜드(Neverland)

미술평론가 류병학

네버랜드(Neverland)? 스코틀랜드 출생의 영국 소설가이면서 극작가인 제임스 메튜 배리(James Matthew Barrie)의 [피터 팬(Peter Pan)]이 떠오른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어린이를 위한 동화 [피터 팬]은 원래 성인소설 [작은 하얀 새(The Little White Bird)](1902)에서 파생된 것이다. [작은 하얀 새]에 담긴 피터 팬의 이야기를 제임스 메튜 배리는 크리스마스 아동극(1904년)으로 각색하고, 동화 [피터와 웬디(Peter and Wendy)](1911)를 출간한다. 이후 제목에서 웬디가 삭제된 [피터 팬]은 영화와 애니메이션 그리고 뮤지컬 등으로 제작되어 100년 전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오늘날 어린이들에게도 알려진 증조할머니/증조할아버지와 증손자/증손녀가 서로 공유 가능한 마치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동화처럼 남아있다.

피터 팬이 사는 ‘네버랜드(Neverland)’는 영원히 어른이 되지 않는 나라이다. 2003년 개봉한 P.J. 호건(P.J. Hogan) 감독의 영화 [피터 팬]은 판타지 액션 영화에 걸맞은 화면을 창조하기 위해 호주 퀸즈랜드(Queensland)에 1억2,000만 달러 규모의 대형 세트를 세워 촬영했다고 한다. 호주 퀸즐랜드 북서부 지역의 인구가 적은 곳은 ‘never-never land’로 불린다. ‘never-never land’는 ‘외딴 곳, 인적이 드문 곳, 불모지’를 뜻한다. 하지만 그곳을 영원히 어른이 되지 않는 나라, 즉 ‘이상적인 곳’으로 만든 이가 바로 [피터 팬]의 저자 제임스 매슈 배리이다. 그런데 네버랜드에서 영원히 아이로 남아 있다는 피터 팬은 ‘에버랜드(Everland)’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에버랜드? 1976년 삼성그룹에 의해 국내 최초 가족공원으로 문을 열은 에버랜드의 전신 ‘용인자연농원’말이다. ‘국민관광지’로 지정된 용인자연농원은 1996년 개장 20주년을 맞아 영원함을 의미하는 ‘Ever’와 나라를 뜻하는 ‘Land’의 결합어인 에버랜드(Everland)로 변신한다. 일명 ‘한국판 디즈니랜드’라고 할 수 있는 에버랜드는 일종의 ‘판타지 월드’로 불린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Baudrilard, jean)는 [시뮬라시옹(Simualtion)]에서 디즈니랜드를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의 대표적인 사례로 든다. 그는 미국인들이 디즈니랜드의 이미지를 모델로 삼아 그들의 모습을 만들어 간다는 점에서, 디즈니랜드가 환상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실재적이라고 해석한다. 만약 에버랜드를 장 보드리야르의 목소리를 빌려 적용시킨다면?

에버랜드는 ‘실제의’ 나라, ‘실제의’ 대한민국 전체가 에버랜드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거기 있다. (마치 사회 전체가 감옥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감옥이 있는 것처럼) 에버랜드는 다른 세상을 사실이라고 믿게 하기 위하여 상상적 세계로 제시된다. 그런데 사실은 그곳을 감싸고 있는 경기도 전체와 서울 그리고 대한민국도 더 이상 실재가 아니며 파생 실재와 시뮬라시옹 질서에 속한다.

그렇다면 정소연의 ‘네버랜드’는 무엇일까? 혹 그녀는 월트디즈니(Walt Disney)사의 [리턴 투 네버랜드(Return to Neverland)](2002) 혹은 마크 포스터(Marc Forster) 감독의 [네버랜드를 찾아서(Finding Neverland)](2004)처럼 잃어버린 어린시절로 되돌아가겠다는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겠다. 정소연의 ‘네버랜드’는 쉽사리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심산유곡(深山幽谷)과 같다. 왜냐하면 정소연의 ‘네버랜드’는 무궁무진한 꿈과 현실의 접점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꿈과 현실의 접점이 블랙홀(Black Hole)의 ‘사건지평선(event horizon)’이라도 된단 말인가?

네버랜드_스카이, 진짜 하늘보다 더 진짜 같은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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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연_Neverland-Sky1_Oil on Canvas_100x100cm_2013

정소연의 [네버랜드-하늘1(Neverland-Sky1)](2013)은 컴퓨터로 꼴라주한 사진을 캔버스에 디지털프린팅 한 작품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아름다운 하늘을 찍은 사진에 미키마우스(Mickey Mouse)와 바비(barbie)인형 도상을 오려내 컴퓨터 포토샵 프로그램에서 하나의 화면으로 재구성한 후 캔버스에 인화한 것처럼 보인다고 말이다. 그런데 정소연의 작품은 디지털사진이라고 하더라도 해상도가 디지털사진보다 더 뛰어나 보인다. 그래서 필자는 작품 가까이 접근해 본다. 오잉? 캔버스에 인화한 것이라고 하기에는 피부가 졸라 미끈한 것이 아닌가. 아무리 해상도가 높은 원본 사진을 사용하여 디지털프린팅 한 것이라도 하더라도 캔버스 표면이 마치 도자기 피부처럼 미끈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궁금한 나머지 작품 옆에 위치한 작품명제표를 보니 ‘캔버스에 유화(Oil on Canvas)’라고 표기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하늘도 미키마우스도 그려진 것이란 말인가? 정소연의 [네버랜드-하늘1]이 손으로 그린 그림이라는 것을 적어도 필자에게 믿겨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녀가 어린시절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해서 붙여진 ‘미술 신동’이란 별명이 ‘뻥’이 아니란 말인가?

정소연은 3살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미술 신동’으로 불리면서 자연스럽게 서울 예원학교와 예고를 나와 이대 서양화과에 입학한다. 한때 ‘이대에서 그림을 가장 잘 그리는 학생’으로 통했다고 한다. 그런데 무슨 연유에서인지 그리기에 자신이 있던 그녀가 대학원을 졸업한 후 붓을 놓고 미디어 아트 작업을 시작한다. 그녀는 뉴욕공과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 아트(Communication Arts)를 전공한 것도 모자라 한국으로 귀국하여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 영상공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수여 받는다. 만약 여러분이 정소연의 모든 작품을 조회해 본다면, 그녀가 왜 미술계에서 ‘멀티미디어아티스트’로 분류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미술계 데뷔작으로 간주되는 정소연의 [인형의 집](1997)에서부터 [오프닝 프로젝트(The Opening Project)](2008)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작품들은 오브제와 영상 등 설치작품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이다.

그런데 정소연은 20년 만인 2009년 다시 붓을 잡는다. 그리고 그녀는 첫 회화전을 2010년 미국 뉴욕에 소재하는 갤러리(Tenri Gallery)에서 [홀마크 프로젝트(The Hallmark Project)]라는 타이틀로 개최하고, 그 다음 해인 2011년 이화익 갤러리에서 같은 타이틀로 오픈한다. 정소연의 [홀마크 프로젝트]는 타이틀 그대로 미국산 ‘홀마크 카드’에서 차용한 이미지들을 편집(재구성)하여 캔버스에 표현한 회화작품이다. 이를테면 정소연의 [홀마크 프로젝트-사랑4]는 홀마크사가 제조한 카드들 중 ‘사랑’이라는 카테고리에서 큐피드·하트·장미·신데렐라·왕자·미키·슈퍼맨 도상 등을 잘라내 컴퓨터의 포토샵 프로그램을 이용해 하나의 화면으로 재구성한 후 캔버스에 유화물감으로 정교하게 그린 그림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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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연_홀마크 프로젝트-하늘(Hallmark Project-Sky)_15pieces_Oil and Acrylic on Canvas_2010

정소연의 [홀마크 프로젝트]에 출품된 ‘홀마크-하늘’ 시리즈는 15점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그 15점의 ‘홀마크-하늘’ 시리즈는 주로 소품 크기이다. 와이? 왜 정소연은 ‘홀마크-하늘’ 시리즈를 소품으로 제작한 것일까? 혹 그녀가 20년 만에 붓을 잡았기 때문에? 하지만 당시 전시된 작품들을 보면 ‘홀마크-하늘’ 시리즈 이외의 작품들은 소품보다 사이즈가 크다는 점이다. 당시 모 일간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작가는 “그동안 그림 그리는 법을 잊지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막상 붓을 잡으니 자전거를 타는 것처럼 몸이 기억하더라”며 “당분간은 회화 작업에 매달릴 것”이라고 진술한다. 자신감이 생긴 것일까? 2010년 ‘홀마크-하늘’ 시리즈는 2013년 ‘네버랜드-하늘’ 시리즈로 전이되면서 그림의 사이즈도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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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연_홀마크 프로젝트-하늘2(Hallmark Project-Sky2)_Oil and Acrylic on Canvas_89x44cm_2010

오잉? 그러고 보니 정소연의 ‘홀마크-하늘’ 시리즈에 [네버랜드-하늘1]과 유사한 작품이 있는 것이 아닌가. 정소연의 [홀마크 프로젝트-하늘2(Hallmark Project-Sky2)](2010)가 그것이다. 정소연의 [네버랜드-하늘1]는 마치 [홀마크 프로젝트-하늘2]의 오른쪽 화면을 확장시킨 것처럼 적어도 필자의 눈에 보인다. 확장된 하늘에 바비가 출현한다. 그렇다! ‘홀마크 프로젝트-하늘’ 시리즈에는 미키만 등장하고 바비는 등장하지 않는다. 와이? 왜 정소연은 ‘홀마크 프로젝트-하늘’ 시리즈에 바비를 출현시키지 않은 것일까? 왜 그녀는 ‘네버랜드-하늘’ 시리즈에 미키와 바비를 함께 캐스팅한 것일까? [네버랜드-하늘1]에서 미키는 마치 손오공처럼 하늘을 뛰어다니는 반면, 바비는 얼굴만 내밀고 있다. 혹 바비는 아직 네버랜드에 완전히 들어온 것이 아니란 말인가? 미키는 두 손을 벌리고 누군가를 환영하듯 뛰고 있다. 그렇다면 미키가 바비에게 영원히 어른이 되지 않는 네버랜드로 들어오라고 유혹하는 것이란 말인가? 그렇다! 1928년생 미키마우스와 1959년생 바비는 2014년 지금 늙지 않고 예전 그대로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네버랜드는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 바로 가상실재, 즉 시뮬라크르(Simulacre)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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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홀마크 카드_하늘
우) 도감_하늘

정소연의 [홀마크 프로젝트-하늘2]와 [네버랜드-하늘1]에 그려진 하늘은 한결같이 같은 하늘처럼 보인다. 정소연이 차용한 그 두 개의 하늘은 모두 사진이다. 그런데 필자가 그 하늘들을 옆으로 나란히 놓고 비교해 보니, 그들 사이에 미묘한 차이가 느껴진다. 만약 ‘홀마크-하늘’이 서정적이라면, ‘네버랜드-하늘’은 도상적으로 보인다. 그렇다! 정소연은 ‘홀마크-하늘’을 홀마크 카드에서 차용한 반면, ‘네버랜드-하늘’ 경우는 도감에서 차용한 것이다. 홀마크사 카드의 이미지는 사람(소비자)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준다는 슬러건을 내건 사실상 상업적 관점에서 제작(생산)되는 반면, 도감(圖鑑)은 독자들에게 실물(원본)을 대신하여 그림이나 사진으로 동류(同類)의 차이를 한 눈으로 식별할 수 있도록 교육적 관점에서 제작된다. 따라서 홀마크사의 카드 하늘과 도감의 하늘은 사진 선별 관점부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 이번에는 정소연이 차용한 홀마크 카드의 하늘과 그녀가 그린 하늘을 비교해 보자. 언듯 보기에 그들은 마치 대량으로 복제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옆으로 나란히 배치해 놓고 본다면, 우리는 그들 사이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그렇다! 당신이 지적했듯이 컬러에 미소한 차이가 있다. 정소연이 그린 ‘홀마크 프로젝트-하늘’은 홀마크 카드의 하늘보다 조금 진하다. 그리고 질감의 차이로 ‘홀마크 프로젝트-하늘’은 깊이감을 느끼게 하는 반면, 홀마크 카드의 하늘은 그에 비해 평평하게 보인다. 물론 그 두 개의 하늘은 진짜 하늘, 즉 자연의 하늘은 아니다. 하나는 기계로 제작된 하늘(사진)이고, 다른 하나는 손으로 그려진 하늘(그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진짜 하늘보다 더 진짜 같이 보인다. 와이? 왜 자연의 하늘보다 생산된 하늘이 더 진짜 같이 보이는 것일까? 혹 우리는 자연의 하늘보다 인공의 하늘에 더 적응되어 있기 때문일까?

홀마크 카드의 하늘은 자연의 하늘을 모델로 제작된 것인 반면, 정소연의 ‘홀마크 프로젝트-하늘’은 홀마크 카드의 사진을 모델로 그려진 것이다. 따라서 ‘홀마크 카드-하늘’의 원본은 자연의 하늘인 반면, 정소연의 ‘홀마크 프로젝트-하늘’의 원본은 사진인 셈이다. 그렇다면 정소연의 ‘홀마크 프로젝트-하늘’은 복제의 복제가 아닌가? 원본이 복제물이라면 그곳에는 원본이 부재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원본이 부재하는 복제의 나라에서 원본/복제, 현실/환상, 실재/가상이라는 이분법은 적용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당 필자, 이번에는 정소연이 차용한 도감의 하늘과 그녀가 도감의 하늘을 보고 그린 하늘을 비교해 보자. 언듯 보기에 그들은 마치 대량으로 복제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옆으로 나란히 배치해 놓고 본다면, 우리는 그들 사이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그렇다! 당신이 지적했듯이 정소연이 그린 ‘네버랜드-하늘’은 마치 직사각형의 도감 하늘을 압축시켜 정사각형으로 만들어 놓아 더 선명하게 나타난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만약 당신이 당신의 컴에서 직사각형의 하늘 이미지에서 상/하는 그대로 놓아둔 상태에서 좌/우의 크기를 축소시켜 정사각형으로 만든다면, 정사각형의 하늘 이미지는 직사각형의 하늘 이미지보다 더 선명한 이미지로 느껴지게 될 것이다.) 마치 그것을 증명이나 하듯 구름의 형태도 압축된 것 같이 보인다. 물론 컬러에도 미묘한 차이가 있다. 그것은 평평하게까지 보이는 도감의 쾌청한 하늘보다 컬러에 변화를 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들은 정소연의 ‘네버랜드-하늘’이 도감의 하늘보다 깊이감을 느끼게 한다.

정소연의 [네버랜드-하늘1]은 [홀마크 프로젝트-하늘2]와 마찬가지로 모델로 삼은 도감 사진보다 더 진짜 같이 그려져 있다. 물론 [네버랜드-하늘1]은 [홀마크 프로젝트-하늘2]보다 캔버스의 크기가 더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좀 더 정교하게 그려져 있다. 사실 필자가 정소연 스튜디오에서 [네버랜드-하늘1]을 처음 보았을 때 인화를 매우 잘한 사진으로 착각했다. 아니, 사진보다 더 사진 같아 보여서 필자는 사진인지 확인하기 위해 작품 가까이 접근하여 부분 부분을 나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필자는 정소연의 [네버랜드-하늘1]에서 ‘손 맛’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당신이 궁금해 할 것 같아 필자가 미리 작가에게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린 것인지.

정소연의 시크릿 메이크업을 밝힌다!

정소연은 그녀만의 메이크업(makeup) 노하우에 대해 적잖은 문의를 받았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화(장)법’을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필자에게 털어놓았다. 메이크업의 사전적 의미는 ‘제작하다, 보완하다’이다. 따라서 정소연의 메이크업은 유화물감과 붓을 사용하여 대상인 사진의 장점을 부각하고 단점은 수정 및 보완하는 미적 행위로 자신의 정체성, 가치관을 표현하는 것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여기서 말하는 정소연의 메이크업은 기초화장(바탕칠)을 한 다음에 하는 ‘색조 화장’을 뜻한다.

정소연은 그녀가 모델로 삼은 사진에 딱 맞는 맞춤형 메이크업을 하기위해 무엇보다 도구를 세심하게 챙기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녀는 ‘홀마크 프로젝트’ 시리즈를 제작할 당시만 하더라도 유화와 아크릴을 병행하여 사용한 반면, 신작 ‘네버랜드’ 시리즈에서는 오직 유화만 고집한다. 와이? 아크릴이 너무 빨리 마른다는 점 때문이다. 적잖은 화가들에게 아크릴의 빠른 마름은 장점으로 간주되는 반면, 그 장점이 정소연에게 단점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신작에서 아크릴을 배제시킨 이유들 중 하나는 붓 때문이다. 그녀가 선호하는 붓은 가는 털이면서 탄력이 있는 붓이란다. 그래서 그녀가 선택한 붓은 팬 브러시(Fan Brush)이다. 근데 아크릴은 팬 브러시 사용이 쉽지 않다. 결국 그녀는 ‘실험’ 결과 유화와 팬 브러시를 사용하기로 결정한다.

팬 브러시는 미용의 팬 브러시와 마찬가지로 부채꼴 모양으로 생긴 브러시다. 그런데 미용의 팬 브러시는 (여러분께서 저보다 더 잘 아시겠지만) 파우더를 바른 후, 여분의 가루를 털어낼 때 혹은 아이섀도 화장 후 눈 밑에 떨어진 여분의 가루를 털어낼 때 사용한다. 미용의 팬 브러시는 한 마디로 화장 후 여분의 가루를 털어내는 데 사용되는 반면, 정소연은 팬 브러시로 ‘화장(그림)’을 하는(그리는)데 사용한다. 그녀는 유화물감을 묻힌 팬 브러시로 마치 얼굴 화장하는 것처럼 살살 펴주면 붓 자국을 감출 수 있다고 한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녀는 팬 브러시로 수차례 반복하여 작업하기 때문에 캔버스 피부의 요철(凹凸)은 은폐되고 미끄러운 피부를 갖게 된다.

머시라? 정소연의 ‘네버랜드’ 시리즈에서 볼 수 있는 도자기 같은 윤광 피부가 오로지 유화물감과 팬 브러시로만 만들어진 것이냐고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메이크업의 목적은 외부의 먼지나 자외선, 대기오염 및 온도 변화에 대해서 피부를 보호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정소연은 ‘색조화장’을 끝내고 난 다음 일종의 ‘코팅’ 작업을 한다. 그녀가 ‘코팅’ 작업에 사용하는 것은 글로스 바니쉬(Gloss Varnish)이다. 바니쉬의 역할은 표면 손상과 먼지 등의 표면 침투를 줄이고, 공기방울이나 구멍이 생기는 현상을 최소화시키는 것이다. 더욱이 글로스 바니쉬는 그림을 그리고 나서 보존을 시키되, 은은하게 빛나는 ‘윤광 베이스’처럼 광택이 있게 한다. 물론 그림 표면을 도자기 같은 윤광 피부로 만들고자 한다면 글로스 바니쉬를 5-6회 팬 브러시로 살살 펴주어야만 붓 자국이 없어진단다. 그렇게 코팅 작업까지 끝난 정소연의 하늘은 아날로그의 ‘손맛’은 사라지고 디지털의 ‘미끈함’만 남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그녀는 아날로그 페인팅이 아닌 디지털페인팅을 그리고자 한 것이란 말인가?

정소연의 비주얼 스캔들(visual scandal)

“사진이 아니라 그림이라고요?” “진짜 손으로 그린 겁니까?” “진짜 하늘보다 더 진짜 같다!” 진짜 하늘보다 더 진짜처럼 보이도록 그려진 정소연의 하늘을 보는 관객은 감탄하게 된다. 그런데 그녀는 진짜 하늘보다 더 진짜처럼 그려놓은 하늘에 미키와 바비를 등장시켜 관객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그렇다! 정소연의 [네버랜드-하늘1]은 일종의 ‘현대판 해학(諧謔)’이라고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하늘과 만화의 캐릭터들(미키와 바비)라는 이질적인 것들이 서로 어울려(諧) (관객을) 희롱(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정소연의 [네버랜드-하늘1]을 ‘익살스럽고도 멋이 있는 농담(弄談)’으로 간주한다.

이질적인 이미지를 결합하여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시각표현을 ‘비주얼 스캔들(Visual Scandal)’이라고 부른다. 1950년경 프랑스의 그래픽 디자이너 레이몽 샤비냑(Raymond Savignac)이 “포스터는 보는 스캔들”이라고 주장하면서 시각전달을 위한 아이디어의 표현수단으로 ‘비주얼 스캔들’이라는 용어를 명명한데서 기인한다. 따라서 비주얼 스캔들은 일종의 ‘서구판 해학’인 셈이다. 그렇다면 정소연이 이질적인 이미지들을 결합하여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홀마크 프로젝트(Hallmark Project)는 꿈과 현실, 주입된 이미지와 실재에 관한 이야기이다. 홀마크 프로젝트는 우리에게 친숙한, 미국산 카드 브랜드인 홀마크 카드의 이미지들을 이용한 작업이다. 홀마크 카드의 이미지는 상징이고 기호로 작용하여 실재를 대체한다. 어린 시절, 친숙한 홀마크의 사랑스러운 크리스마스카드 이미지들은 나에게 ‘크리스마스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주입해 주는,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꿈’이었다. 홀마크 카드는 인간 삶을 카테고리 별로 이미지화 한다. 홀마크 카드의 각 섹션에는 우리의 감정과 인생이 시간대 별로, 상황 별로 이미지화 되어 있다. 이미지들은 부드럽고 달콤하며 강력하게 주입되어 꿈과 현실을 뒤 섞는다… 홀마크 프로젝트는 장자(莊子)의 호접지몽(胡蝶之夢)의 21세기 미국판 버전이다.”(정소연의 [홀마크 프로젝트] 작업노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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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마우스_홀마크 카드

먼저 정소연의 [홀마크 프로젝트-하늘2]를 보자. 작가는 홀마크 카드의 하늘을 홀마크 카드의 ‘Sympathy’ 섹션에서 차용한다. 반면 미키는 미국의 대표적 캐릭터인 만큼 다양한 섹션들(‘To my son’ ‘To my grandson’ ‘Birthday’ ‘Thank you’ 등)에서 출현한다. 따라서 [홀마크 프로젝트-하늘2]는 연민과 아들, 동정과 손자, 연민과 생일, 동정과 감사가 결합된 셈이다. 아들이나 손자 등 주로 아이들의 생일과 관련된 미키가 연민(憐憫) 혹은 동정(同情)을 상징하는 하늘과 접목되어 이질적인 느낌을 준다. 아이와 성인을 결합시킨 [홀마크 프로젝트-하늘2]는 마치 서로 이질적인 꿈과 현실을 접목시킨 것처럼 보인다. 미키(를 빌린 홀마크사)는 말한다. “난 방금 너에게 말했다(I just HAD to tell you…)” 무엇을?

자, 이번에는 [네버랜드-하늘1]을 보자. 작가는 자연 도감의 ‘기상’ 섹션에서 하늘을 차용한다. 반면 미키는 [홀마크 프로젝트-하늘2]에서 보았듯이 홀마크 카드의 다양한 섹션에서 등장한다. 그렇다면 바비는? 바비는 홀마크 카드의 ‘To my daughter’ 섹션에서 차용한 것이다. 따라서 바비가 딸을 상징한다면, 미키는 아들을 상징하는 셈이다. 자식들(딸과 아들)의 생일과 관련된 미키가 이번에는 ‘기상’을 상징하는 하늘과 접목된 것이다. 만약 [홀마크 프로젝트-하늘2]가 아이와 성인을 결합시킨 것이라면, [네버랜드-하늘1]은 아이들과 기상을 결합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네버랜드-하늘1]은 [홀마크 프로젝트-하늘2]보다 꿈과 현실을 좀 더 적극적으로 접목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쵸?

필자는 지나가면서 [홀마크 프로젝트-하늘2]의 미키(를 빌린 홀마크사)가 “난 방금 너에게 말했다”고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너’는 누구일까? 미키(를 빌린 홀마크사)의 입장에서 본다면, 상대가 소비자, 즉 ‘우리’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 정소연의 [네버랜드-하늘1]에는 미키와 바비가 함께 출현한다는 점에서 미키의 말, 즉 “난 방금 너에게 말했다”에서 ‘너’는 ‘바비’를 지시하는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미키가 바비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우리는 들을 수 없다.

머시라? 미키가 바비에게 사랑을 고백한 것이라고…요? ”난 방금 너에게 졸라 사랑한다고 말했다고…(I just had to tell you this but I love you so much…)“ 뭬야? 바비가 미키에게 반한 것이라고…요? 미키가 노래한다. ”넌 내게 반했어 / 솔직하게 말을 해봐 / 도도한 눈빛으로 제압하려 해도 / 난 그런 속임수에 속지 않을 테야 / 워우워우워~~~~ 워우워~~“ 네/ 바비의 눈빛이 애매하다고요? ”넌 내게 반했어 / 애매한 그 눈빛은 뭘 말하는 건지 / 넌 내게 반했어 / 춤을 춰줘 컴온 컴온~ / 내 눈과 너의 눈이 마주쳤던 순간 / 튀었던 정렬의 불꽃은 / oh! Stand by Me!“ 미키는 바비가 ”원한다면 밤하늘의 별을 따다 줄“ 태세이다. 머시라? 미키는 노브레인(no brain), 즉 뇌가 없다고…요? 뭬야? 뇌가 없는 건 바비도 마찬가지라고요? 미국에서 ‘바비 인형 같은 여자’는 성적 매력은 있으나 멍청해 보이는 여자를 뜻한다고…요?

버뜨(BUT), 정소연의 [네버랜드-하늘1]에서 정말 미키가 바비에게 ‘말걸기’를 하는 것일까? 혹 그것은 ‘실제의’ 대한민국 전체가 네버랜드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네버랜드를 그려놓은 것처럼 미키(를 빌린 홀마크사)가 소비자에게 말걸기 하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바비를 등장시킨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여러분께서 정소연을 홀마크사의 마케팅 담당 직원으로 착각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으시겠죠? 홀마크사는 (미키의 목소리를 빌려) 노래한다. ”넌 내게 반했어 / 솔직하게 말을 해봐 / 도도한 눈빛으로 제압하려 해도 / 난 그런 속임수에 속지 않을 테야 / 워우워우워~~~~ 워우워~~“

인형의 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그녀의 이야기는 자신의 약혼식과 결혼식으로부터 시작된다. 요즘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어릴 때부터 가지고 놀아 온 바비 인형을 확대하여 약혼식과 신혼 때 입었던 자신의 옷을 입혀 놓은 모습은 많은 여성들의 이상적 자아의 표본이다. 그것은 실상 여성이 스스로 만들어낸 형상이라기보다 남성이라는 타자의 ‘시선(gaze)’에 의해 만들어진 자아상이다. 또한 서구형의 미인이나 서구식의 약혼복이 보여주듯이, 그 시선에는 서양인이라는 또 하나의 타자의 시선이 중첩되어 있다. 서양 미인에게 입혀 놓은 한복에 이르면 우리는 여성의 자아 이미지에 얼마나 많은 서로 다른 시선들이 교차하는지를 깨닫게 된다. 여성의 자아란 주체가 소실된 빈 장소로서, 그곳에서는 다양한 힘의 논리로 물들여진 타자의 시선들만이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자본주의와 소비사회의 유통구조 속에 함몰된 공간이기도 하다. 획일화 된 바비 이미지는 여성의 이미지마저 상품과 같이 만들어지고 포장되어 유통되고 남성들은 그것을 쇼핑하듯 취하는 이 시대 남녀관계의 도상이다. 그것은 교환가치로 통용되는 인간관계의 표본인 것이다.”(윤난지의 [한 여성작가가 증언하는 20세기의 풍경: 정소연의 근작] 중에서.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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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정소연_인형의 집(인형 옷-약혼)_작가의 약혼 드레스, 구두, 아크릴_201x118x8cm_1997
우) 정소연_인형의 집(인형 옷-새색시)_작가의 신혼 한복, 고무신, 아크릴_201x118x8cm_1997

필자는 지나가면서 정소연의 [인형의 집] 시리즈를 미술계 데뷔작으로 간주했다. 그녀의 [인형의 집] 시리즈는 일단 스케일에서 관객을 압도한다. 우리가 흔히 보아왔던 바비 인형과 달리 정소연의 [인형의 집] 시리즈에 등장한 바비는 사람의 크기와 같은 크기(等身大)로 확대되어 있다. 물론 바비는 확대된 (사진)이미지인 반면, 옷과 신발은 당신이 입고 신을 수 있는 실재 옷과 신발이다. 핑크빛 드레스를 입은 금발의 바비와 한복을 입은 금발의 바비. 윤난지는 바비 인형을 “남성이라는 타자의 ‘시선(gaze)’에 의해 만들어진 자아상”으로 해석한다. 그 점에 관해 이주헌은 한 걸음 더 들어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인형의 집]은 결혼이라는 과정이 유독 여자에게만 그 역할과 지위상의 이데올로기적 굴레를 강제하는 데 대한 비판을 담은 작품이다. 주지하듯 약혼식과 결혼식의 주인공은 신부다. 신랑에 앞서 신부가 주목을 받는 것은 그것이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 있어 신부가 우월적 지위에 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신부가 꽃같이 아름답게 꾸며지는 것은 신부가 하나의 ‘아름다운 타자’임을 공개적으로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그 신부를 그렇게 규정하는 것일까? 그것은 사회다. 그리고 사회의 위임을 받아 ‘신부의 주인이 되어야 할’ 신랑이다. 바로 그 시선에 의지해 가부장 사회의 문화가 규정하는 여자의 삶과 지위, 역할을 하나의 화려한 치장으로 칭송하는 자리가 약혼식과 결혼식 자리인 것이다. 이때 드레스와 한복은 대상=객체=타자로 전락한 신부의 좌표를 상기시켜주는 외화 된 규제로서 그들의 의식과 행위를 철저히 주어진 이데올로기 안에 복속시키기 위한 장치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이데올로기에 의거해 형식이 내용을, 삶을 규제하는 장면을 포착한 작품인 셈이다.”(이주헌의 [보편적 현실에 대한 분명한 비판의식의 발현] 중에서. 1998)

정소연의 [인형의 집(인형 옷-약혼)](1997)은 부제에서 암시하듯 그녀가 약혼식 때 입고 신었던 드레스와 하이힐이다. 그리고 [인형의 집(인형 옷-새색시)](1997)는 작가가 결혼식 때 입고 신었던 한복과 고무신이다. 따라서 정소연이 바비(이미지)로 대체된 셈이다. 왜 그녀는 부재하는 자신의 자리에 바비(이미지)를 위치시킨 것일까? 그렇다! 바비는 여러 가지 옷을 갈아 입혀가며 역할놀이를 할 수 있다. 정소연은 어린시절 바비를 가지고 역할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그렇다! 오늘날과 달리 1970년대 바비 인형을 가지고 놀 수 있었던 아이들은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들일 것이다.

2011년 정소연은 [홀마크 프로젝트] 개인전 당시 모 일간지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 외가가 대사관저로 쓰였던 주택이어서 서양식 정원을 보며 자랐다”며 “좀 더 크고 나서야 내가 익숙했던 풍경이 정작 우리나라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었음을 깨달았다”고 진술했다. 작가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단적으로 알려주는 대목이다. 작가는 어린시절 바비 인형을 가지고 놀았고, 크리스마스 때는 홀마크 크리스마스카드를 주고받았다. 작가는 어린시절 향유했던 일들을 잊고 살다가 미국 유학시절 미국의 대형 카드사인 홀마크 매장에서 홀마크 카드를 접하면서 그녀의 기억 속에 각인된 어린시절을 떠올리고는 홀마크 카드를 수집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모은 카드가 수천 장에 이른다고 한다. 작가는 “내 기억 속 풍경은 한국적 정서와는 동떨어진 것이었지만 홀마크 카드를 보며 마치 고향에 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며 “어린 시절 접한 홀마크사의 사랑스러운 크리스마스카드 속 이미지들은 나에게 현실보다 더 실재감 있는 이미지로 각인되었던 것”이라며 [홀마크 프로젝트]를 제작하게 된 비하인드 스토리를 밝혔다. 그렇다면 정소연의 [홀마크 프로젝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작업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그녀의 [인형의 집] 시리즈 역시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작업이 아닌가?

필자는 정소연의 [인형의 집]을 보면서 두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하나는 누구보다 그리기에 자신 있었던 정소연이 무슨 이유로 붓을 놓고 오브제 작업을 한 것일까? 다른 하나는 왜 정소연은 등신대 크기로 확대한 바비(이미지)에 자신이 약혼식과 결혼식에 입었던 실재의 옷을 접목시켜 ‘인형의 집’으로 명명한 것일까? ‘바비 인형의 집’도 아니고 그냥 ‘인형의 집’일까? 문득 노르웨이의 극작가 헨리크 입센(Henrik Ibsen)의 희곡 [인형의 집(Et Dukkehjem)](1879)이 떠오른다.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혹 모르시는 분을 위해 그리고 기존 평론들에서 이 점이 간과되었다는 점에서 입센의 [인형의 집]을 간략하게 언급해 보겠다.

여주인공 노라는 변호사 헬마와 결혼하여 행복한 생활을 누린다. 하지만 달콤한 신혼생활도 잠깐, 남편은 큰 병에 걸린다. 노라는 남편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이미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이름을 위서(僞書)하여 고리대금업자 크로그쉬타로부터 돈을 빌린다. 이후 남편은 완쾌하여 출세의 길을 걷는다. 남편이 은행장으로 취임하게 된 것이다. 남편은 은행 직원 중 악질로 알려진 직원을 해임시키고자 한다. 그런데 그 직원이 다름아닌 아내 노라가 위서로 돈을 빌린 고리대금업자 크로그쉬타이다. 크로그쉬타는 노라에게 위서로 남편을 실각시키겠다고 위협한다. 결국 남편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자, 남편은 지위를 잃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아내에게 배신당했다고 비난한다. 물론 친구의 노력으로 위서를 되찾아 부부는 위기를 벗어난다. 하지만 노라는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이 단순히 ‘인형’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남편은 재결합을 원하지만, 노라는 남편에게 “나 자신에 대한 의무가 있다”고 말하고 집을 나간다. 물론 노라는 이혼한 후 불확실한 미래에 부딪치게 된다.

아들 하나를 둔 싱글맘인 정소연은 모 일간지 인터뷰에서 [인형의 집]에 관해 “이혼 직후 바비 인형 고르듯 상품화된 결혼, 결혼식이나 약혼식 당일에만 유효한 화려한 드레스의 허상을 보여주고 싶어 시도한 작품”이라고 털어놓는다. 그렇다면 정소연의 [인형의 집]은 자신이 노라처럼 단지 ‘인형’에 지나지 않은 결혼생활을 폭로한 것이란 말인가? 그녀는 “그럴듯하게 포장된 슬픈 이야기인 내 작품은 유복하게 자라 겉으로는 아무 문제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씁쓸한 이야기로 가득 찬 나 자신을 투영한 것”이라고 토로한다. 그렇다면 정소연의 [인형의 집]은 ‘나 자신에 대한 의무’, 즉 아내 이전에 책임 있는 한 인간으로서 살기 위한 하나의 ‘선언’이 아닌가? 두말할 것도 없이 정소연도 노라처럼 이혼한 후 불확실한 미래에 부딪치게 될 것이다.

이제 한 가지 궁금증은 풀린 셈이다. 등신대 크기로 확대한 바비(이미지)에 작가 자신이 약혼식과 결혼식에 입었던 실재의 옷을 접목시켜 ‘인형의 집’으로 명명한 이유 말이다. 자, 이번에는 정소연이 붓을 놓고 오브제 작업을 한 이유에 대해 알아보자. 만약 정소연이 [인형의 집]을 그림으로 그려놓았다면? 작가는 자신이 그려놓은 옷과 신발이 약혼식과 결혼식 때 입었던 것이라고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해야만 할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왜 작가가 그림이 아닌 오브제를 직접 차용한 것이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정소연이 새로운 매체를 사용한 것은, 흔히 말하듯 “미디어 아트의 매력에 빠져 붓을 놓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메시지 전달을 위해 그에 적합한 매체를 선택한 것이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정소연의 [홀마크 프로젝트]나 신작 [네버랜드] 시리즈는 그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전달을 어떤 매체보다도 회화가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면 정소연의 회화로의 귀환은 공교롭게도 작가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작업으로 보여진 것이란 말인가? 그렇다! 작가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행보는 이미 [인형의 집]에서부터 시작된다.

필자는 지나가면서 [인형의 집]에서 정소연이 바비(이미지)로 대체되었다고 중얼거렸다. 정소연은 자신의 약혼식과 결혼식에 입었던 옷을 바비(이미지)에게 입힌다. 따라서 [인형의 집]에는 그녀의 대체물만 남아있는 셈이다. 그렇다! 정소연의 [인형의 집]은 이질적인 것들의 접목, 즉 바비(이미지)와 실재의 옷이 접목된 작품이다. 그것은 실재와 가상이 접목된 일종의 ‘비주얼 스캔들’ 작품이다. 그렇다면 정소연의 [인형의 집]은 [네버랜드] 시리즈와 문맥을 이루는 것이 아닌가?

“나의 작업 구상은 아들로부터 나온다.”

“자연사 박물관의 곤충표본과 같이 전시된 만화 캐릭터 표본들은 자신의 아이가 가지고 노는 장난감에서 착안한 것이다. 정소연의 독특함은 아이와의 삶 속에서 ‘모성’이라는 주제보다 현대인의 일반적인 모습을 발견하였다는 점이다. 그녀의 아이는 진짜 쥐는 보지도 못했으면서 미키는 너무나 익숙하다. 그것은 ‘모조(simulacrum)’가 ‘실재(the real)’를 대치해버리는 대중매체 시대와 소비사회에서의 이른바 ‘하이퍼리얼(hyper real)’한 경험을 말하고 있다. 장 보드리야르가 모조체계의 완벽한 모델의 예로 든 디즈니랜드라는 모조가 우리나라의 어린이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모조의 ‘자전적 과정(precession)’은 국경을 넘어 전세계적으로 확산되는 것이며, 따라서 미키, 미니, 구피, 도널드는, 그녀의 제목대로, [20세기의 화석]인 셈이다.”(윤난지의 [한 여성작가가 증언하는 20세기의 풍경: 정소연의 근작] 중에서.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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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연_동물채집-미키마우스_플레이도우로 캐스팅_1997

자, 이번에는 정소연의 [네버랜드-하늘1]에 등장한 미키에 대해 살펴보자. 정소연은 [인형의 집] 시리즈를 제작할 1997년 [동물채집] 시리즈도 병행한다. 정소연의 [동물채집] 시리즈는 백화점 완구 코너에서 산 미키마우스, 미니마우스(Minnie Mouse), 구피(Goofy), 도널드 덕(Donald Duck) 등 동물인형을 채집하여 작업한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동물채집] 시리즈 중에서 이 지면에서 논의하고 있는 ‘미키마우스’만 국한해서 살펴보겠다. [동물채집-미키마우스]는 일곱 가지 무지개 색(빨주노초파남보)로 채색된 20‘개(마리)’의 미키마우스를 (윤난지의 목소리를 빌려 말하자면) 자연사 박물관의 곤충표본과 같이 액자에 박제해 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 작품 옆에 다음과 같은 일종의 ‘채집일지’도 전시되어 있다.


학 명 : 미키마우스(Mickey Mouse)
생물학적 분류 : 설치류, 쥐과
채집장소 : 대한민국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5층 완구매장 내 PLAYSCHOOL 코너
채 집 자 : 유헌종(정소연의 3년 7개월 된 아들)
창 조 자 ; Walt Disney
출생년도 : 1928년
출 생 지 : 미국
기 원 : 1928년 11월 18일 만화영화 “Steamboat Willie” 로 데뷰
서 식 지 : 미국을 중심으로 북한을 제외한 전세계에 분포되어 있음
주변인물 : 여자친구 Minnie Mouse / 두 명의 조카들 Morty and Ferdie / 애완견 Pluto

리움 미술관의 아트 스펙트럼(Art Spectrum) 2006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정소연은 [동물채집] 시리즈에 관해 다음과 같이 밝힌다. “나의 아들은 1997년도 작품인 [동물채집] 등의 제작에 있어 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했다.” 정소연은 관찰 대상 1호로 그녀의 아들을 든다. 1997년 정소연의 아들 유헌종은 당시 ‘미키 마니아’였는데, 그녀의 아들은 팬티도 미키가 그려져 있지 않으면 안 입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루는 그녀의 아들이 “미키를 만나는 것이 소원”이라고 해서 도쿄 디즈니랜드를 방문하기도 했단다. 윤난지가 말했듯이 그녀의 아들은 “진짜 쥐는 보지도 못했으면서 미키는 너무나 익숙”해 한다는 것이다. 윤난지는 그것을 ‘모조’가 ‘실재’를 대체하는 장 보드리야르의 ‘하이퍼리얼’한 경험으로 해석한다.

정소연은 [동물채집-미키마우스]를 ‘플레이도우로 캐스팅’한 것으로 표기해 놓았다. 그렇다! 그것은 백화점 완구 코너에서 오브제(완제품)을 차용한 것이 아니라 미키마우스를 직접 손으로 캐스팅할 수 있는 일종의 ‘점토놀이기구세트’, 즉 플라스틱 틀과 ’고무찰흙‘인 플레이도우(Play-Doh)가 들어있는 세트를 구입하여 작가가 직접 작업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기계로 대량생산된 일종의 ‘레디-메이드(ready-made)’가 아니라 손으로 복제한 것이다. 하지만 정소연과 그녀의 아들이 복제하는 것은 “원천이나 실재 없이 실재적인 것의 모형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 즉 디즈니랜드가 창조한 미키마우스가 다름아닌 ’시뮬라크르(Simulacre)‘가 아닌가? 그렇다면 미키마우스 점토놀이기구세트로 미키마우스를 복제하는 행위는 미키마우스를 확대재생산하는 ’시뮬라시옹(Simulation)‘의 질서를 따르는 것이 아닌가?

디지털 시대의 회화란 무엇인가?

오늘날 미술은 특정 유파들로 불리던 모더니즘 미술과 달리 ‘다원주의’로 불린다. 그만큼 미술이 다양해졌다는 것을 반증한다. 미술 장르의 다양성 이외에 미술의 변화 또한 빠르다. 모더니즘시대의 유파는 일정기간 지속된 반면, 오늘날 다원주의 미술은 제대로 평가되기도 전에 소비되어 버린다. 따라서 우리는 미술의 가치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오늘날의 미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마치 시간여행을 하듯 가까운 과거로 되돌아가고자 한다.

필자는 미술사를 당대의 시대정신과 함께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필자는 현대미술의 탄생을 ‘수공업의 종말’을 선언한 산업혁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본다. 이를테면 산업혁명으로 ‘수공업의 종말’을 고한 대량생산시대를 접어들면서 장구한 ‘수공업 미술’도 변화의 물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대량생산이라는 시대정신을 간파한 아티스트들은 누구일까? 필자는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분류하고자 한다. 하나는 수공업의 종말을 고한 대량생산시대의 시대정신을 따른 ‘다다’나 뒤샹의 ‘레디-메이드’가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수공업의 종말에 대응한 ‘추상미술’이나 ‘미래파’ 그리고 ‘초현실주의’가 그것이다. 전자는 아티스트의 ‘손’을 배제한 반면, 후자는 아티스트의 ‘손’을 긍정했다.

정소연은 지난 20년간 전자를 따라 작업해 왔다고 할 수 있겠다. 필자가 지나가면서 피상적이나마 살펴보았던 정소연의 [인형의 집]에서부터 길이가 51cm에 달하는 에폭시로 제작된 캡슐 안에 달콤한 M&M’s 초코렛들이 들어있는 [달콤한 약](1998), B급 룸싸롱의 금장 안주 접시 위에 갖가지 모양의 인조 보석들(모조진주, 큐빅, 스팽글 등)로 만든 아름답게 반짝이는 디저트 작품인 [디저트를 좀 드시겠습니까?(Would you like some dessert?)](1998) 등은 실재와 모조 사이에서 놀이한다.

정소연의 첫 영상작품은 감고 있는 여자의 눈 이미지를 세로로 자리바꿈시켜 여성의 성기 이미지로 환치시킨 [욕망을 보는 눈](1998)이다. 관객은 여성의 감은 눈을 여성의 성기로 착각하여 관음증의 대상으로 바라보려는 순간 여자는 감은 눈을 떠 바로 관객을 바라본다. 정소연은 보는 것/보여지는 것이라는 시선의 문제를 [나르시시즘](1999)에서부터 작가 자신이 살고 있는 뉴욕의 아파트와 방에서 내다본 창밖 풍경을 3개의 비디오 영상에 담은 [웰컴 투 마이 하우스(Welcome to my House)](2005)와 관찰자/내부자의 시선으로 뉴욕 내 한국작가 관련 전시회 오프닝 모습을 담은 [더 오프닝 프로젝트(The Opening Project)](2006-2008)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작업한다.

영상작업의 특징들 중의 하나가 복제일 것이다. 정소연은 디지털 시대에 사라져가는 아날로그 기법을 작업에 도입하여 형식과 내용의 두 측면에서 ‘사라져가는 것’의 개념을 다룬 [아날로그 복제에 의한 이미지 변조](2000-2002) 시리즈 작업들(사랑, 슬픔, 호흡)을 한다. 물론 그녀는 영상작업의 특징들 중 하나인 시간/공간에도 주목한다. [과거, 현재(The Past, The Present)](2000-2002) 시리즈(하늘, 정원, 정물, 거리, 공원)와 [과거, 현재-안과 밖](1999) [흔적(Trace)](2000) [청계2가](2003) [흔적-뉴욕(Trace-NY)](2006)이 그것이다.

필자는 미술 패러다임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 아날로그 아트와 디지털 아트가 그것이다. 아날로그 아트가 회화와 조각으로 불리는 전통적인 미술을 뜻한다면, 디지털 아트는 디지털 환경에 적합한 새로운 미술형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디지털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는 오늘날 아날로그 아트는 끝났단 말인가? 아날로그 아트가 끝났다기보다 차라리 아날로그 아트가 예전 같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2009년 [옥토버(October)] 가을호에서 할 포스터(Hal Foster)는 “한때 일부 작품과 이론을 좌우했던 ‘네오 아방가르드’와 ‘포스트모더니즘’ 같은 패러다임들이 궁지에 빠졌다”고 진단한다. 그런데 아날로그 아트가 궁지에 빠졌을 때, 디지털 아트가 출현한다. 흥미롭게도 정소연은 디지털 아트가 지적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는 시점에 궁지에 빠진 아날로그 아트로 귀환한다. 더욱이 그녀가 지난 20년간 꾸준히 작업했던 디지털 아트를 ‘물류창고(Warehouse)’에 유보시킨 채 말이다.

장구한 미술사에서 특히 가장 많은 양의 ‘생산’을 자랑하던 회화는 ‘수공업의 종말’과 함께 위기를 맞이한다. 물론 이미지시대에서 영상시대로 접어든 오늘날, 회화는 여전히 살아있다. 하지만 오늘날 회화는 영상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회화만의 특성을 간파해야만 한다. 따라서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진부한 질문을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 질문은 이전 시대의 질문과는 다르다. 이를테면 오늘날 회화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아날로그 시대’의 회화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디지털 시대’의 회화에 대한 질문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디지털 시대의 회화란 무엇인가?

네버랜드, 당신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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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연_네버랜드3(Neverland3)_Oil on Canvas_크기_2014

정소연의 [네버랜드3(Neverland3)](2014)는 사진과 그림으로 그려진 화려한 식물들로 가득한 일종의 ‘식물나라’이다. 사진의 경우 컬러 식물 사진뿐만 아니라 흑백 식물 사진도 보인다. 아니다! [네버랜드3]은 [네버랜드-하늘1]과 마찬가지로 유화로 그려진 그림이다. 사진보다 더 사진처럼, 그림보다 더 그림처럼 그려진 것이 바로 [네버랜드3]이다. 그렇다! 그 그림은 식물도감에서 사진과 그림으로 실린 각종 식물들을 스캔 받아 잘라내어 컴퓨터의 포토샵 프로그램에서 하나의 화면에 재구성한 디지털이미지를 유화물감과 팬 브러시로 정교하게 그린 것이다. 물론 작가는 그려진 그림 위에 팬 브러시로 글로스 바니쉬를 5-6회 부드럽게 발라 도자기 같은 윤광 피부로 만들어 놓는다.

머시라? 어떤 식물이 도감의 사진을 보고 그린 것이고, 어떤 식물이 그림을 보고 그린 것인지 헷갈린다고…요? 사실 필자도 졸라 헷갈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을 위해 도감의 사진들을 제외한 그림들만 이곳에 나열해 보겠다. 상단 좌측에 거꾸로 있는 양귀비 꽃, 그림 중앙 상단 진달래 꽃, 하단 우측 올리브가 육백만불 사나이의 눈을 빌려 발견한 도감의 그림을 보고 그린 그림이다. 나머지는 모조리 도감의 사진을 보고 그린 그림이 되겠다. 정소연이 차용하여 그린 도감의 그림들 중에서 양귀비 꽃과 도감의 사진들 중에서 우측 상단에 거꾸로 있는 솔방울을 이곳에 제공하니 정소연의 그림과 비교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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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양귀비 꽃_그림 전보라
우) 솔방울_Photography by Robert Llewellyn

정소연 왈, “오래전부터 식물도감이나 동물도감 등의 도감류 서적들을 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 도감들은 아들을 키우면서 ‘다시’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아들과 함께 ‘다시’ 보게 된 각종 도감들은 한국에서 출판된 도감들뿐만 아니라 외국 여행을 할 때마다 다양한 도감들을 구입한 것들입니다. 저는 사진이나 세밀화로 된 이미지들을 보며 실재보다 그 이미지에 더 익숙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네버랜드’ 시리즈가 시작되게 된 것이지요. 이번 신작 ‘네버랜드’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은 각종 도감들에서 따온 이미지들로써 원본이 사진인 것도 있고 그림인 것도 있으며 흑백 이미지인 것들도 있습니다. 각 이미지들은 최대한 원본 그대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기후에 공존할 수 없는 각종 식물들이 뒤 엉켜 한 화면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필자는 지나가면서 도감을 독자들에게 실물(원본)을 대신하여 그림이나 사진으로 동류(同類)의 차이를 한 눈으로 식별할 수 있도록 교육적 관점에서 제작된 것으로 중얼거렸다. 그렇다! 우리는 진짜 식물들을 보기 전에 도감에서 사진이나 그림으로 식물들을 미리 본다. 그런데 도감에 실린 식물들은 만개한 꽃들, 즉 가장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카메라에 담거나 그린 그림이다. 따라서 우리가 진짜 식물을 보았을 때 도감에서 보았던 식물보다 사실적이지 못하다고 느끼곤 한다. 자연의 식물보다 도감의 식물(사진/그림)이 더 진짜같이 보이는 효과를 가리켜 일명 ‘디즈니랜드 효과’라고 부른다. 이 점에 관해 셰리 터클(Sherry Turkle)은 [스크린 위의 삶(LIFE ON THE SCREEN)](2001)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지금도 어린 시절 소녀단을 따라 브루클린 식물원에 갔을 때의 일이 생생하다. 나는 그때 안내원에게 꽃이 피는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사람들은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 월트 디즈니에서처럼 저속 촬영한 연속 화면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정소연의 [네버랜드3]을 보면 각종 도감들에서 사진들과 그림들을 모델로 삼아 ‘최대한 원본 그대로 묘사’하였다기보다 차라리 원본보다 더 원본처럼 그려져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흥미롭게도 정소연은 (그녀가 말했듯이) 기후에 공존할 수 없는 각종 식물들을 한 화면에 그려놓았다. 정소연의 식물나라에 있는 식물들은 기후에만 제약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중력의 법칙도 따르지 않는다. 어느 식물은 지면에서 하늘로 자라있는가 하면, 어느 식물은 하늘에서 지면을 향해 자라있기도 하고, 어느 식물은 측면에서, 만개한 꽃은 허공에 떠있기도 하니까. 그렇다! 정소연의 ‘네버랜드’의 식물들은 더 이상 자라지도 않지만 시들지도 않는다.

정소연 왈, “실현 불가능한 기호의 숲을 나는 ‘네버랜드’라고 명명한다. 도감에서 차용한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네버랜드는 꿈과 현실이 해체된 또 다른 현실이자 그 사이에 존재하는 블랙홀이다.”

정소연의 [홀마크 프로젝트] 시리즈는 (정소연의 목소리를 빌려 말하자면) 꿈과 현실을 뒤 섞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네버랜드-하늘1]은 현실과 꿈 사이에서 놀이한다. 반면 [네버랜드] 시리즈는 꿈과 현실이 해체된 또 다른 현실, 즉 ‘네버랜드’이다. 그렇다면 [네버랜드-하늘1]은 [홀마크 프로젝트] 시리즈에서 [네버랜드] 시리즈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는 그림이 아닌가. 따라서 미키나 바비는 [네버랜드] 시리즈에 부재한다. 그렇다고 [네버랜드] 시리즈에 식물만 있는 것도 아니다. ‘네버랜드’에는 새도 등장하고 동물도 출현한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녀의 ‘네버랜드’에는 앞으로 각종의 이미지들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정소연은 ‘네버랜드’를 꿈과 현실 사이의 ‘블랙홀’로 명명한다. 머시라? ‘검은 구멍’은 우리의 시각으로 볼 수 없다고요?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블랙홀은 어느 것도 빠져 나오지 못해 검게 보일 것이라는 추측에서 ‘검은 구멍’이라고 명명된 것이기도 하다. 누군가 말했듯이 회화는 단순히 보이는 것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도 표현하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그녀는 ‘네버랜드’ 시리즈를 통해 관객에게 무엇을 전달하고 싶은 것일까?

누구에게나 꿈은 있다. 그러나 어린시절의 꿈은 성인이 되면서 현실의 벽에 부딪친다. 그래서 꿈은 단지 꿈으로 남겨진다. 그러나 그녀는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는 도감의 이미지들을 재구성하여 ‘네버랜드’를 그려놓는다. 지나가면서 보았듯이 그녀는 서로 다른 지역의 식물들이 마치 순간이동을 통해 한 화폭 안에서 서로 만날 수 있도록 그려놓는다. 그녀의 그림에는 열대기후와 온대기후 그리고 고산기후 또한 냉대기후의 식물들이 동거한다. 그렇다! 정소연은 초능력자이다. 그녀는 물체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무버(Mover)의 능력을 가진다.

정소연에게 임파셔블한 미션은 없다. 그녀는 회화를 가지고 재기발랄하게 놀 줄 안다. 그녀는 우리가 상상하고, 꿈꾸던 초능력을 화폭을 통해 펼쳐놓는다. 그녀는 마치 꿈의 세계를 창조하는 설계자 아리아드네처럼 또 다른 현실을 화폭에 설계해 놓는다. 기발하고 독창적인 정소연의 상상력은 신선함을 준다. 그렇다! 그녀는 관객들에게 그녀의 ‘회화나라’로 뛰어들어 놀랍고 마법 같은 모험을 떠나자고 제안한다.

정소연은 그녀가 원하는 곳이 있으면 순식간에 그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 일명 ‘점퍼(Jumper)’와 닮았다. 물론 그녀는 직접 자신의 몸을 움직여 순간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스튜디오에서 붓 하나로 캔버스에 순간이동을 한다. 그렇다면 디지털시대의 화가는 세상을 바꾸는 초능력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캔버스 안에서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