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 한 여성작가가 증언하는 20세기의 풍경 : 정소연의 근작 _ 윤난지 (이화여대교수, 미술사)
한 여성작가가 증언하는 20세기의 풍경 : 정소연의 근작
윤난지 (이화여대교수, 미술사)
“그림이란… 본질적으로 일정한 질서 하에 구성된 색채들로 뒤덮인 평평한 표면이다.” 라는 모리스 드니의 선언 이래 현대미술은 ‘순수형식’이라는 고유의 성전을 지켜왔다. 미술의 아이덴티티를 지키는 일을 지상과제로 삼았던 모더니스트들은 ‘미술스럽지’ 않은 모든 것을 미술로부터 추방하고자 하였는데, 그들이 가장 우려한 불순물이 ‘언어’였다. 언어는 삶과 접하여 있기 때문에(클레멘트 그린버그), 또는 각 예술장르 사이에 있는 것이므로(마이클 프리드), 미술을 더럽힌다는 것이다. 그들이 특히 추상미술을 옹호한 것은 그것이 침묵의 형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 모든 미술은 말을 해 왔다. 종교적 내용이나 역사적 사실, 또는 미술가 개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 않은 미술은 없다. 심지어 추상미술도 완전히 비어 있는 형식으로 그치는 경우는 없다. 완벽한 형식주의자를 자처했던 애드 라인하르트의 화면에서조차도 우리는 강한 종교적 메시지를 읽어내게 된다. 추상미술도 그것의 형식 뒤에 언어를 숨기고 있는 것이다. 문학적인 것이든, 서사적인 것이든, 또는 담론이든, ‘주제’가 없는 미술이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더니즘 이후의 미술가들이 각각의 목소리에 실어 낸 언어는 미술 밖에서 새삼 끌어들인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순수형식이라는 얼굴 뒤에 감추어져 있는 언어를 회복하고자 하는 강한 충동을 실행에 옮기고 있는 것이다. 보로프스키의 ‘중얼거리는 사람’은 그들 모두의 초상일 것이다.
소위 모더니즘 교육을 받고 추상미술로 첫 개인전을 시작하여 구체적인 이야기를 담아내기 시작한 이번 전시로 이어지는 정소연의 짧은 작업 경력 속에서도 우리는 미술에서 언어를 되살려내려는 이 시대 미술의 충동을 짚어낼 수 있다.
그녀의 이야기는 자신의 약혼식과 결혼식으로부터 시작된다. 요즘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어릴 때부터 가지고 놀아 온 바비인형을 확대하여 약혼식과 신혼 때 입었던 자신의 옷을 입혀 놓은 모습은 많은 여성들의 이상적 자아의 표본이다. 그것은 실상 여성이 스스로 만들어낸 형상이라기보다 남성이라는 타자의 ‘시선(gaze)’에 의해 만들어진 자아상이다. 또한 서구형의 미인이나 서구식의 약혼복이 보여주듯이, 그 시선에는 서양인이라는 또 하나의 타자의 시선이 중첩되어 있다. 서양 미인에게 입혀 놓은 한복에 이르면 우리는 여성의 자아 이미지에 얼마나 많은 서로 다른 시선들이 교차하는지를 깨닫게 된다. 여성의 자아란 주체가 소실된 빈 장소로서, 그곳에서는 다양한 힘의 논리로 물들여진 타자의 시선들만이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자본주의와 소비사회의 유통구조 속에 함몰된 공간이기도 하다. 획일화 된 바비 이미지는 여성의 이미지마저 상품과 같이 만들어지고 포장되어 유통되고 남성들은 그것을 샤핑하듯 취하는 이 시대 남녀관계의 도상이다. 그것은 교환가치로 통용되는 인간관계의 표본인 것이다.
약혼과 결혼 이야기는 중산층 여성의 삶으로 이어진다. 분홍빛 털실로 뜨개질한 욕조와 그 욕조의 허물은 나란히 놓여져서 바비 이미지를 통해 꿈꾸었던 핑크빛 꿈의 헛됨을 말하고 있다. 털실로 한 올 한 올 떠가듯이 차곡차곡 키워 온 미래에 대한 이상은 물이 새거나 담길 수 없는 무용한 욕조처럼 덧없는 것이 된다. 그 제작과정이 오랜 시간과 인내가 요구되는 만큼 그것의 무상함은 더 강조되는 것이다.
사진 작업과 비디오에 이르게 되면 여성의 삶에 대한 정소연의 이야기는 ‘성’이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엮이게 된다. 그녀는 눈을 찍은 사진을 세로로 놓으면 여성의 성기 형태가 된다는 재미있는 발견에서 출발하여, 자신을 포함한 여성들의 눈을 찍어 세로로 세움으로써 눈인 동시에 성적인 이미지가 되게 하였다. 그녀는 우선 대상을 보는 각도에 따라 그것이 다르게 보이는 점을 주지시킴으로써 이미지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기보다 시선의 주체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정소연이 정작 관심을 두는 것은 그와 같은 시각적 게임보다 그 게임의 내용이다. 사색과 통찰을 상징하는 눈이 보는 주체의 기대에 따라서는 욕망과 관능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아이러니에서 여성의 ‘성’에 내포된 특수한 조건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계속적으로 겹쳐지며 움직이는 비디오 화면의 눈은 마치 끊임없이 말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소리 없는 외침이다. 우리는 묻어둔 이야기들을 끄집어내고자 하는 욕구와 그것이 결국 말하여질 수 없다는 좌절을 지켜보게 된다.
여성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아이를 낳아 기르는 체험이다. 자연사 박물관의 곤충표본과 같이 전시된 만화 캐릭터 표본들은 자신의 아이가 가지고 노는 장난감에서 착안한 것이다. 정소연의 독특함은 아이와의 삶 속에서 ‘모성’이라는 주제보다 현대인의 일반적인 모습을 발견하였다는 점이다. 그녀의 아이는 진짜 쥐는 보지도 못했으면서 미키는 너무나 익숙하다. 그것은 ‘모조(simulacrum)’가 ‘실재(the real)’를 대치해버리는 대중매체 시대와 소비사회에서의 이른바 ‘하이퍼리얼(hyperreal)’한 경험을 말하고 있다. 장 보드리야르가 모조체계의 완벽한 모델의 예로 든 디즈니랜드라는 모조가 우리나라의 어린이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모조의 ‘자전적 과정(precession)’은 국경을 넘어 전세계적으로 확산되는 것이며, 따라서 미키, 미니, 구피, 도널드는, 그녀의 제목대로, <20세기의 화석>인 셈이다.
여성-결혼-성-현대인으로 이어지는 정소연의 이야기 저변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는데, 그것은 예술 자체에 관한 것이다. 상품화된 복제 인형들, 핑크 빛 털실, 경박한 합성수지 재료들, 사진과 비디오 등은 예술의 성역을 위협하는 키치적 어휘다. 재료나 형태, 색채 뿐 아니라 그녀의 제작원리의 기본을 이루는 복제와 확대 역시 키치적 어법이다. 정소연은 모더니즘에서 억제되었던 언어를 부활시킬 뿐 아니라 그 언어를 가지고 모더니스트들이 세워 놓은 ‘예술’이라는 법전을 위반하고자 한다. 이제 미술작품은 한 천재 작가의 독창적인 창조물이 아니라 주변에 널린 세속적 이미지 상품 중에서 선택하고 차용한 것이 되었다.
결국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삶 전체의 ‘식민화(colonialization)’다. 남성적 시선이 여성의 자아를, 서구인의 시선이 우리의 아이덴티티를, 모조가 실재를 식민화 하는 가운데, 예술마저도 가짜예술인 키치라는 제국에 먹혀 들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풍경이 잿빛의 우울한 정경으로 그치지 않을 수 있는 길은 그것을 지켜보는 예술가의 눈에 있다. 이제 정소연은 겨우 눈을 뜨기 시작한 신예 작가다. 그녀의 눈이 더 성숙하고 예리해져서 더 설득력 있고 세련된 어휘로 말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