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유희 뒤에 숨은 현대 미술의 정체성 : 뉴미디어로 풀어낸 이미지의 힘 _ 진휘연 (미술사)

유희 뒤에 숨은 현대 미술의 정체성 : 뉴미디어로 풀어낸 이미지의 힘

진휘연 (sadi 교수, 미술사)

“이미지는 프레임(틀)에서 튀어나와야 한다.”라는 17세기 화가 파체코의 충고는 21세기에도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다. 이미지는 분명 틀보다 크다. 이미지가 틀에 갇혀있든, 아니면 그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이든, 오늘도 이미지는 그것을 싸고 있는 틀과 다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프레임은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수용의 관습이나 인식의 틀을 의미하고, 관객들의 반응을 고정시키기에, 이미지는 언제나 그 틀을 극복하려는 끊임없는 도전의 과제를 안고 있다.

뉴미디어 예술 작품은 그런 점에서 여전히 많은 도전에 직면한다. 새로운 매체가 궁극적으로는 관객들의 작품에 대한 인식과 미감까지 바꾸게 되리라는 폴 발레리의 주장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미 많은 관객들은 기계적으로 앞선 소통 방식에 익숙하다. 다만 뉴미디어 작품이 디지털 매체의 성격에 매몰되어 기술적 특징을 보여주는 데 그침으로써, 관객들의 시각을 오히려 제한시켰다는 비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매체의 성격을 파악하고 그를 이용하면서도 미술 작품의 복합성과 다양한 텍스트로서의 본성을 만족시켜주려는 정소연의 개인전은 그런 점에서 틀과 이미지간의 관계에 대한 즐거운 해답이 된다.

정소연은 ‘뉴미디어’를 적극적으로 작품에 이용해왔으며 새로운 기술의 습득에도 매우 의욕적이다. 동시에 입체나 설치 등의 장르도 배제하지 않는, 열린 관심을 견지해왔다. 이번 개인전에 작가는 <진짜 더 잼 있는 전시>라는 장난기 가득한 제목을 붙였다. 재미는 현대 미술은 물론, 모든 문화 산물의 샐링-포인트(selling point)이기도 하지만, 그녀에게 ‘재미’는 실제로 미술의 현주소에 관한 몇 가지 신중한 질문들을 가리는 위장적 개념이다.

질문 하나. 예술작품의 근원과 존재
예술 작품의 근거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많은 학자들의 끈질긴 질문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물적 존재성으로도, 미에 대한 인식론으로도 규명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술 작품을 철학 담론의 일부로 편입시킴으로써, 실재 작가들이 느끼는 작품의 본성과 괴리를 가져오기도 했다. 이번 전시의 <물류창고>는 작가가 느꼈던 작품의 근원과 존재에 대한 고민을 나타내준다.

작품은 물적 통합성이나 미감(美感)의 온전함 보다는 부분적이고, 이질적이고, 되다 만 듯한 물건들로 남아 작업장 구석에 쌓인다. 전시에서 철수된 후 상자에 들어가 본래의 형태와 맥락을 잃고, 전기 코드/ 안테나선/ 실리콘/ 비디오테이프 등의 이름으로 상자에 담긴 이들이 바로 정소연 작품의 근거이다.
미적 감상이나 숭배의 대상과는 전혀 다른 존재성을 갖고, 작품의 맥락에서 쉽게 해체되고, 마치 납골당에 놓여 이제는 육신의 흔적에 지나지 않는 부품 같이 변한 이 물건들은, 전통 미술 작품의 상징적 무게에서도 벗어났다.

작업실에 쌓인 이 상자들이 그렇다고 반드시 설치나 뉴미디어 작품에만 관련되지는 않는다. <물류창고>는 전시 후, 더 이상 같은 존재로 보일 수 없는 예술작품 전체에 대한 진혼곡이다. 형태나 내용에서 자유로워진 사물들이 곧 작품의 근거가 됨은 예술 작품을 제작하는 작가와 관객 모두에게 그것의 물적 존재성의 애매함을 단적으로 보여줄 뿐 아니라, 통일된 완성품과 감각적 온전함, 영원한 보존성 등의 개념을 내세웠던 전통적 철학자들의 논의를 전복시키는 것이다.

<물류창고>가 고전적 작품 존재론에 대한 이의제기라면, <Art Works Vending Machine>은 새로워진 유통 방식에 대한 소개이다. 힘들게 관객을 기다릴 필요 없이 작품은 이제 CD로 구워져 자동판매기에서 판매된다. 변화한 작품의 물성처럼, 작품에 덧입혀졌던 관념적 무게가 사라진다면 이런 미술 작품 판매대를 볼 날도 곧 올 수 있다. 특히 큰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거대한 컨베이어벨트를 제작한 작가의 투혼이 돋보이는데, 작품에서 이제껏 가려졌던 완성품 뒤의 기계적 소음이나 투박한 움직임을 밖으로 드러냈다는 점에서도 작가의 작품에 대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두 번째 질문 : 재현된 공간과 실체, 그리고 작가와 관객의 거리
지하 차고에 마련된 <Welcome to my House>는 이번 전시의 또 다른 펀치라인이다. 작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뉴욕의 아파트와 방에서 내다본 창 밖 풍경을 3개의 비디오 영상에 담았다. 실제 공간의 깊이를 전시장에 그대로 옮겨옴으로써 그 방의 생생함을 느끼도록 방의 구체적인 공간감을 전달하려는 의도를 갖는다. 물론 전시장의 사정상 약간의 변화는 피할 수 없었지만 디지털 영상화 된 두 개의 창, 즉 실제 방 안의 모습과 창에 비친 방, 두 개의 창을 우리 앞에 열어놓았다. 관객은 작가와 함께 말 그대로 작가와 함께 그의 공간과 일상의 삶을 경험한다.

그녀에게 가장 사적인 공간을 보여줌으로써 현실 속 인물과 작가라는 이데올로기적 존재가 구분될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지만, 관객은 여전히 그 밖에 서있는 관찰자 이상이 되지 못한다. 관객과 작가, 공간과 평면(스크린), 재현과 실체 사이에는 여전히 분명한 벽이 존재한다. 작가는 재현이라는 오래된 미술의 화두를 공간과 시간의 투입을 통해, 주체와 객체의 관계의 모호함을 통해 접근하는데, 실제 공간과 관객의 위치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어쩌면 뉴미디어는 전통 미술의 문제와 위치를 그대로 이어받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세 번째 질문 : interactivity와 그 후
미술관의 작품들은 관객을 언제나 수동적으로 만든다. 그들을 작품형성의 조건으로 참여시키는 것은 작가들에겐 늘 어려운 과제였다. 정소연은 관객들에게 ‘외치라’고 명령한다. <Shout!>의 명령을 받은 관객의 외치는 소리는 앞에 놓인 화면에 반응을 불러온다. 왼편 스크린에는 미리 입력된 단어들이 소리의 크기나 지속에 따라 나타났다 사라지고, 오른편 스크린에는 화면 앞에 선 관객들의 모습이 드러난다.

센서를 전제로 한 <Shout!>가 소통의 기계적 단면을 보여준다면 상상과 행위의 상호성을 전제로 한 <성인미술>과 <예술치료>는 관객들의 또 다른 반응을 불러온다. ‘19세’ 딱지가 붙은 입구는 깃털로 덮여있고 스크린에서는 바비 인형들이 인간의 성교장면을 재연하고 있다. 다양한 체위를 짧게 이어간 비디오 작품은 포르노그라피의 자극을 허구화 시키는 재미를 보여준다. 바로 옆방에 놓인 침대는 관객들에게 실제 성행위를 유도하고, 그를 통한 치료의 과정을 상상하게 하는데, 마치 예술의 치유적 본질을 가정하되, 그것을 비웃듯, 그 모든 과정의 가상적 관계를 유쾌하게 지적한다. interactivity처럼 최근 미술에서 강조되지만 모호해진 실체가 또 있을까? 관객은 작가의 친절한 도움과 유도에도 불구, 그다지 현실적인 실천의 욕구를 느끼지 못한다. 예술은 궁극적으로 관객을 치유하는 힘을 가져야 하지만, 직접적인 치유를 유도하는 자세도 모순이기 때문이다.

남은 질문 : 뉴미디어 미술의 가능성
작가는 이번 개인전에서 다양한 영상작업과 오브제를 이용한 설치를 선보인다. <뫼비우스 띠 (mobius strip)>는 작가가 스틸사진들을 짧게 편집하고 텍스트를 결합시켜 마치 무성영화시대의 영화처럼 이미지와 나레이티브를 결합시켰다. 반복적인 일상의 이미지가 강박적으로 다가오는 광경을 광고처럼 빠르게 엮어낸 <뫼비우스의 띠>에서 정소연은 그의 감각적 편집술과 이미지의 매력을 발산한다.

그녀의 작품에는 심각한 주제도 가벼운 농담처럼 변화시키는 여유가 있다. 정소연은 관객들에게 보는 즐거움과 이야기를 회복했으며, 미술사의 다양하고도 뜨거운 질문들 속에 숨어있는 예술 작품의 순기능을 엿보게 해주었다. 맥루한의 지적대로 매체는 매세지이지만 그 매세지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정소연의 이번 전시는 매체가 목적이 아닌, 도구가 되었다는 점에서 뉴미디어 작품에 대한 풍성한 결실을 기대하게 한다. 이제 틀보다 커진 이미지가 새로운 화두를 던져주길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