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 보편적 현실에 대한 분명한 비판의식의 발현 _ 이주헌 (미술비평)

보편적 현실에 대한 분명한 비판의식의 발현

이주헌 (미술비평)

정소연은 앞서 언급했듯이 두 작가에 비해 보다 더 구체적인 현실 문제를 건드린다. 하지만 ‘주체-타자’ 혹은 ‘중심-주변’의 이분법에 대한 비판의식을 깔고 있다는 점에서 고낙범과 일정한 연관성이 있으며, 언어 혹은 언어적 서술을 의식한다는 점에서 김남진의 세계와도 연이 전혀 없지는 않다.
정소연이 이번 전시에 출품한 작품은, 확대된 바비인형 사진에 작가 자신이 약혼식 때 입었던 드레스와 한복을 입힌 <인형의 집>과, 눈을 사진으로 찍어 이를 수직으로 세워 선보인 <욕망을 보는 눈>, 백화점 완구 코너에서 산 미키 마우스 등의 인형을 전시한 <동물채집>등으로 이뤄져 있다.
<인형의 집>은 결혼이라는 과정이 유독 여자에게만 그 역할과 지위상의 이데올로기적 굴레를 강제하는 데 대한 비판을 담은 작품이다. 주지하듯 약혼식과 결혼식의 주인공은 신부다. 신랑에 앞서 신부가 주목을 받는 것은 그것이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 있어 신부가 우월적 지위에 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신부가 꽃같이 아름답게 꾸며지는 것은 신부가 하나의 ‘아름다운 타자’임을 공개적으로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그 신부를 그렇게 규정하는 것일까? 그것은 사회다. 그리고 사회의 위임을 받아 ‘신부의 주인이 되어야 할’ 신랑이다. 바로 그 시선에 의지해 가부장 사회의 문화가 규정하는 여자의 삶과 지위, 역할을 하나의 화려한 치장으로 칭송하는 자리가 약혼식과 결혼식 자리인 것이다. 이때 드레스와 한복은 대상=객체=타자로 전락한 신부의 좌표를 상기시켜주는 외화 된 규제로서 그들의 의식과 행위를 철저히 주어진 이데올로기 안에 복속 시키기 위한 장치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이데올로기에 의거해 형식이 내용을, 삶을 규제하는 장면을 포착한 작품인 셈이다.
<욕망을 보는 눈>은 눈의 이미지를 여성의 성기 이미지로 환치 시킨 작품이다. 프로젝터를 통해 벽에 투사된, 반복적으로 오버랩 되는 눈은 장면장면마다 빛의 방향이나 눈의 뜨고 감은 모양이 다르지만, 그 미묘한 변화들을 통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성적 욕망, 그 욕망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시각화하고 있다. 물론 눈이라는 것이 전통적으로 여성의 성기를 암시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 입술이 오히려 그 역할을 맡아왔다 – 이런 접근이 다소 낯선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살의 갈라짐을 통해 육체 안과 밖 사이의 긴장관계를 드러내는 것이나 각막의 점액성을 강조함으로써 어느 정도 성적 연상을 뒷받침해주는 것에서 그 상징처리의 ‘적법성’을 인정할 수 있다. 이럴 때 눈은 그 자체가 욕망의 표현물이 되어 그가 바라보는 대상과 일체화된다. 작가는 현대의 과포화 상태에 이른 욕망의 대상물들과 그로 인해 그 자체가 욕망과 닮아버린 한 감각기관의 관계를 현대인의 좌표로 내놓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눈은 결국 눈이다. 우리가 이 눈을 여성의 성기처럼 관음증의 대상으로 바라보려 하면 순간 그 눈이, 그 눈동자가, 다시 우리를 되 쳐다보는 현실에 우리는 직면하게 된다. 관음의 주체로서 나의 정체가 노출되고 순간 나는 바라봄의 주체가 아니라 바라봄의 객체로 전락하게 되는 엄청난 환경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욕망이란 이렇듯 종국적으로 늘 눈동자에 의해 제동이 걸리게 돼 있다. 신의 눈동자이든, 타인의 눈동자이든, 혹은 나 자신의 눈동자이든 그것은 욕망이 그 심연에 죄의식이라는 집을 짓고 살기에 발생하는 일이다. 어떤 욕망의 대상이든 사실 그 안에는 이런 눈동자가 숨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소연이 욕망의 대상에 눈동자를 포치한 것은 이런 갈등의 위치를 확인하려는 시도이자 반어법적인 방식으로 ‘욕망의 리얼리즘’을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궁극적으로 현대인의 불합리한 좌표와 외적으로 점점 그 같은 불합리를 부추기는 조건 – 무엇보다 욕망 -, 그리고 그 같은 긴장 속에서 분열될 수밖에 없는 자아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REVIEW 1998 여름호 P41-P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