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실재와 가상의 틈에서 : 정소연의 ‘어떤 풍경(some Landscape)’

실재와 가상의 틈에서 : 정소연의 ‘어떤 풍경(some Landscape)’

김영호 (중앙대교수, 미술평론가)

2010년 뉴욕의 텐리(Tenri) 갤러리에서 <홀마크 프로젝트(Hallmark Project)> 시리즈를 선보인 이래 정소연이 천착하고 있는 매체는 캔버스 회화이다. 데뷔작으로 알려진 1997년의 ‘인형의 집’ 이후 오랫동안 오브제와 영상설치 작업에 몰입했던 그녀가 홀연히 캔버스 회화로 귀환 한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정소연은 국내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한 이후 뉴욕으로 건너가 ‘커뮤니케이션 아트’를 전공하고, 귀국 후에는 다시 ‘예술공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 과정에서 디지털 이미징, 게임공학, 컴퓨터그래픽스 따위가 파생하는 가상현실과 가상실재의 세계에 익숙해졌을 터이다. 그러나 그녀는 캔버스 회화에서 디지털 미디어를 수렴하는 또 다른 층위의 표현 가능성을 발견했던 것일까. 이후 디지털 기술과 치열한 손작업을 융합한 그림은 정소연에게 실재와 가상의 공간을 영속적으로 표상하는 새로운 길을 걷도록 허락했다.

정소연의 캔버스 회화는 실재와 가상 사이의 틈을 화면에 펼쳐 놓은 것이다. 두 영역 간의 우연한 결합과 예기치 않은 만남이 그림을 보는 방식과 시각을 재구성하는 방식을 모색케 한다. 그녀의 화면에는 현실이 아닌 사진 혹은 도감에서 빌려온 이미지들이 주를 이룬다. 소녀시절의 꿈과 기억이 담긴 미국 홀마크사의 카드 이미지나 미키마우스·바비인형 따위의 캐릭터의 이미지가 그것이다. 또한 동·식물 이미지와 건축의 모형에 이르는 다양한 이미지들이 자리잡고 있다. 작가는 이러한 이미지들을 컴퓨터 모니터로 들여와 디지털 이미징 작업으로 재구성한 후 캔버스에 세밀히 옮겨 그려낸다. 가상의 대상들을 그림의 원본으로 삼아 컴퓨터로 복제하고 그것을 다시 캔버스에 옮겨놓는 이중의 차용방식을 도입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실재와 가상이 어우러진 새로운 의미구조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의 낯선 풍경 시리즈에 각각 <홀마크 프로젝트>와 <네버랜드>라는 제명을 붙였다.

정소연의 작업노트에 따르면 <홀마크 프로젝트> 시리즈는 “꿈과 현실, 주입된 이미지와 실재에 관한 이야기”이다. 또한 <네버랜드> 시리즈는 “실현 불가능한 기호의 숲이며 꿈과 현실이 해체된 또 다른 현실이자 그 사이에 존재하는 블랙홀”이라 설명하고 있다. 정소연의 회화작업은 이렇듯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풍경이자 시간과 공간이 서로 뒤엉키고 혼합된 차원의 세계를 보여준다. 불확실하고 모호하며 덧없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는 관객들의 시각을 긴장시키고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질적인 것들이 모여 이루어진, 그러므로 작가가 채택한 이중의 차용방식 사이에는 복합적인 차원의 가상현실과 가상실재의 개념이 등장하게 된다. 1981년에 출간되고 2001년 국내에 번역 소개된 장 보드리야르의 저서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은 정소연의 작업을 해석하는데 하나의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

정소연은 캔버스 회화를 통해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인 무엇을 읽어내기를 관객들에게 요구한다. <홀마크 프로젝트> 시리즈는 동화의 세계를 둘러싼 감각의 층위 아래로 비치는 덧없음과 잔인성을 폭로하려는 것이라는 작가의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다양한 기후대의 동·식물들을 하나의 화면에 뒤엉키게 배치한 <네버랜드> 시리즈는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역설적인 발언이 담겨 있다.

이번 개인전에서 선보이는 <어떤 풍경(Some Landscape)> 시리즈는 <홀마크 프로젝트>와 <네버랜드> 시리즈에 뒤이어 작가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즉 주관적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 <어떤 풍경>에 등장하는 것은 푸른 창공 아래 펼쳐진 적막한 도시 풍경이다. 눈부시도록 사실적으로 묘사된 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부드럽고도 강렬한 빛이 그림 속의 백색 도시를 환상의 세계로 이끌고 있다. 도시의 건물은 석고 조형물처럼 하얗고 언덕이나 산들 역시 정밀한 등고선의 곡선으로 묘사되어 인위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사실적으로 그려진 하늘과는 대조적으로 건물들은 의도된 모형물임을 강조함으로써 실재와 가상이라는 두 개의 층위가 그림에 작동하며 관객의 시선을 낯설게 만들어 낸다.

정소연은 <어떤 풍경> 시리즈에서 건축모형 풍경을 두 개의 범주로 나누어 놓았다. 하나는 도시 풍경을 특정지역의 건축 모형에 의존하지 않고 작가가 컴퓨터 모니터 상에서 자유롭게 구상해 낸 것이며, 다른 하나는 경주의 ‘안압지’라는 특정지역의 모형을 사진으로 촬영해 화면위에 그대로 옮겨 그린 것이다. 전자는 세상 어디에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 풍경(Virtual Landscape)이며 후자는 실제로 존재하는 특정지역의 원본 모형을 본뜬 의사 풍경(Pseudo Landscape)이다. 이 모든 경우에 작가가 의도하는 것은 실재와 가상의 접목된 세계에 대한 다층적인 해석의 가능성에 주목하도록 하는 것이다. 전자가 원본 없는 실재와 그 모형 사이에 대한 물음이라면 후자는 안압지라는 실재하는 정원과 그 모형 사이에 대한 물음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작가는 건축모형을 빌어 현실과 비현실의 세계가 서로 얽혀진 세계로 관객들을 안내한다. 거기서 만나는 것은 가상 풍경 또는 의사 풍경이라 부를 수 있는 낯설면서도 낯익은 풍경의 세계이다.

정소연은 이번 개인전에 미래의 작품을 예견하는 두개의 실험 작업을 더 내놓았다. 하나는 지름 120cm의 원형 캔버스 위에 풍경을 담은 <포스트-네버랜드(Post-Naverand)> 시리즈이고 다른 하나는 독일 출신 작가의 건축적 공간 작업을 차용한 <토비아스의 카페(Tobias’ Cafe)>다. 우선 <포스트-네버랜드>는 지난 개인전에 발표되었던 <네버랜드> 시리즈의 흐름과 발전단계를 보여주는 작업이다. ‘유리구슬(Cristal Ball)’ 이라는 별칭이 붙은 이 원형 캔버스 작품에는 기존의 작업에 등장하는 동·식물의 이미지와 이번에 선보이는 건축 모형의 이미지가 각각 들어 있다. 유리구슬에 들어 있는 이미지들은 마치 마법의 구슬에 갇힌 이미지들처럼 ‘대상화(objectification)’ 되어 관객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작가는 유리구슬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크리스탈 글로스 바니쉬(Cristal Gloss vanish)로 표면을 처리했는데, 이러한 작업에 힘입어 화면 속 공간은 시각 차원의 착시를 넘어 심리적 차원의 착각 영역으로 보는 이들을 안내하고 있다.

<토비아스의 카페>는 캔버스 중앙에 뚫린 사각의 창 너머로 펼쳐진 공간을 묘사한 작품이다. ‘위장무늬(camouflage patterns)’를 이용한 작업으로 새로운 건축적 공간을 만들어내는 토비아스 레베르거(Tobias Rehberger)가 베니스에 만든 카페의 한 부분을 작품의 소재로 차용한 것이다. 두 개의 캔버스에 그려진 창 너머 공간에는 하늘 위로 떠있는 거대한 미로와 언덕 아래로 펼쳐진 마을 풍경이 각각 자리 잡고 있다. 이 그림에서 정소연이 의도하는 것은 안과 밖의 문제, 즉 내부공간과 외부공간의 경계에 대한 모색이라 한다. 작가노트에 따르면 “외부공간을 내부로 끌어들여서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흐리게 하며 내부와 외부를 결합시키고 일상의 공간을 확장시키는 작업”이다. 창문의 왼쪽 모서리에 걸쳐진 하늘 이미지는 두 개의 공간이 결합된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정소연의 <어떤 풍경>은 원본이 없는 가상 풍경이거나 원본을 위한 의사 풍경이다. 거기에는 허상적 실재를 실제처럼 재현한 풍경이 자리 잡고 있으며 실재의 풍경을 닮은 모형으로서 풍경이 담겨 있다. 이렇게 복합적이고 혼란스런 공간을 드러내는 <어떤 풍경> 시리즈는 작가의 오랜 연구 주제로서 풍경에 대한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작가는 일루전의 예술로써 캔버스 회화가 지닌 본성을 수용하고 디지털 이미징을 통해 그 본성에 대해 다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캔버스 속에서 벌어지는 이 약속된 모순과 역설의 상황에 대해 성찰하는 일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상황에 대한 성찰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장 보드리야르의 말을 빌자면 “시뮬라크르란 결코 진실을 감추는 것이 아니다. 진실이야말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긴다. 시뮬라크르는 참된 것이다.” 정소연의 캔버스 회화가 가상과 실재의 틈이 확장되고 모순과 역설이 일상이 되어가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정소연의 회화작업에는 불교에서 갈구하는 이상향으로써 ‘니르바나(Nirvana)’의 세계가 숨 쉬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현실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존재의 실체를 깨닫는 것이 니르바나의 세계다. 그것은 가상과 실재의 틈을 직시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를 자연의 상태에 두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자유의지를 의미하며 정소연의 작품에서 그러한 자유의지를 발견하는 것은 분명 의미 있고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201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