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정소연전 : 21세기 장르화와 베니티(vanity)의 다른 이름 _ 진휘연(미술사)

정소연전 : 21세기 장르화와 베니티(vanity)의 다른 이름

진휘연(성신여자대학교, 미술사)

새로움을 향한 도전은 이제 21세기의 숙명과도 같다. 새로움에 대한 갈망의 속도는 현기증이 난다. 어제의 것에 더 이상 관심을 가질 수 없는 사회와 인간 군상들은 스스로가 경쟁이라는 울타리를 쓰고 무언가 다른, 새롭다고 느껴지는 환상을 쫓아 매일 달려가고 있다.
이런 면에서 이미지는 더 이상 철학적 심미적 단계에 머물 수 없다. 무언가 유효성을 찾으려는 시각 예술가들에게 이미지는 스펙타클의 범주를 둘러쓴 감탄을 생성하거나, 일상의 강렬한 충격을 주어야 하는 단계에 머물고 있다. 대다수 미술관계자들은 시각예술계에서의 이런 흐름에 대한 반격을 기대하면서도 그 반란의 성공을 의심하고 있다. 대중적 매체에서 뿜어내는 이미지의 요란함과 속도전에 시각예술이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 과연 무엇일까? 시간에 대한, 이미지에 대한, 구조적 이탈과 해체는 가능할까?

정소연은 여러 가지 새로움의 흐름에 동참해 왔다. 오브제, 설치, 사진과 영상의 뉴미디어미술, 그리고 회화를 섭렵한 작가는 사회와 미술계의 변화에 대한 관찰의 끈을 놓지 않았고, 다양한 매체를 추구하고 빠르게 적응한다는 점에서 태생적인 성실함을 보여준다. 작품의 주제는 동시대 사회의 대중문화와 일상, 그리고 미술계의 여러 가지 제도적인 모순과 단면들을 다뤄왔다. 주제를 부활시키고 담론 안에서 그것을 소화하여 일종의 텍스트로 작품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작가는 후기모더니즘 이후 동시대 미술의 젊은 어법을 실천하고 있다고 하겠다.
자신이 입었던 약혼식 드레스와 결혼식 예복을 입은 등신대의 바비 인형 세트를 판매하는 상품처럼 제시한 <인형의 집>은 한국 여성에게 기대되는 가부장적인 여성관을 결혼이라는 사회 제도와 산업에 결부시켰다. <천국의 계단>, <부드럽고 따뜻한 욕조와 그 허물>, <디저트 드실래요?>등에서는 부드럽고 가벼운 깃털, 붉은 털실, 장신구의 부속물 등 여성성을 설명하는 여러 소재들을 사용해서 계단이나 욕조, 그리고 고급 술집에서 나오는 화려하지만 구태의연한 디저트 등을 제작했다. 이시기의 오브제들은 작가의 초기 작품들을 대변해 주는데, 너무나 보편화되어서 크게 의심하지 않는 일상적이고 가려진 여성에 대한 억압들을 다루고 있다.
아름답지만 오를 수 없는 계단이나 붉은 욕조, 장신구들로 이루어진 디저트들은 보기에는 매력적이고 화려하지만, 원래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는 좌절된 형태로서, 가시적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성과 실재의 거리를 보여준다. 여성에 요구되는 여러 가지 덕목들의 이중성과도 일맥상통한다. 작품에 사용된 가벼운 물질들은 제도와 산업을 통한 여성에의 지배를 보여주는데, 그녀에게 ‘가벼운 유머’는 실제로 미술의 현주소에 관한 몇 가지 심각한 질문을 가리는 위장 개념이다.

이런 관심은 <욕망을 보는 눈>, <나르시시즘> 등의 영상작품에서도 잘 드러난다. 시각의 주체이지만 동시에 응시의 대상으로서의 여성과 눈의 관계는 그 형태부터 성적 암시를 내포하고 있다.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문학적으로 다룬 <자기만의 방>도 심리적인 ‘자기’의 범주로서의 방과 밖으로 보여지는 연극적 공간으로서의 방에 대한 의미가 중첩되어있다.
<아날로그 복제에 의한 이미지 변조>연작은 사랑, 호흡, 슬픔 등의 주제로 나뉘어졌는데, VHS 비디오테이프에 녹화된 영상을 계속 반복해서 복제함으로써, 질이 떨어지는 화면에 이르는 과정을 담았다. 마치 사랑, 호흡, 슬픔이 점차 희미해지면서 소멸하는 과정을 가시화하듯 화면의 퇴락은 가장 원초적인 시간과 삶의 관계를 드러내고, 기억의 저편으로 희미해지는 모습을 전달했다.
이처럼 작가는 영상속의 또 다른 영상, 또는 그것의 변주곡들을 함께 보여줌으로써 응시의 상호성과 의도가 배제된 ‘보기’와 욕망의 실천인 ‘응시’를 병치하고 있다. 그것은 이미지를 통한 가장 일상적이고도 보편적인 우리 모두의 경험과도 일치한다. 여기에 실시간 흐름을 개입시킴으로써 상황에 대한 상상력을 더한다.
<뫼비우스의 띠>, 등은 공간과 영상의 간극을 다루고 있다. 어두운 전시장에 심겨진 꽃들은 하루해를 찍은 3분30초까지 영상에서 투사되는 빛을 통해 자라난다. 실체와 디지털화한 실상의 관계는 어떻게 변화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한 흥미로운 관찰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가 살고 있는 뉴욕의 아파트와 방에서 내다본 창밖 풍경을 3개의 비디오 영상에 담은 는 전시장 안의 관객에게 작가의 방을 경험하도록 실제 공간의 깊이를 그대로 옮겨왔다. 두 개의 창을 담은 영상에는 밖으로 보이는 야경과 실제 방 안의 모습들이 눈높이로 고스란히 담겨지고 작가와 그의 아들의 모습이 다른 비디오로 투사되면서 관객들은 마치 방안에 들어선 듯 한 구체적인 공간감을 가상 체험하게 된다.
작가는 재현이라는 전통적 미술의 화두를 공간과 시간의 프리즘을 통해, 또 주체와 객체의 관계의 혼성성을 통해 접근함으로써 새로운 매체의 성격과 그것을 통한 표현과 경험의 확대, 기술과 참여의 문제들을 실험했다. 매체와 화두 모두 동시대성에 충실하려 한 정소연의 작품들은 새로움에 대한 집중력과 관심에의 증거로 보인다. 이미지보다는 소통의 틀이 더 중요한 작품의 근거로 작동하던 시기의 작품들을 살펴보았다.

미국에서 학업과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마치고 돌아온 작가는 올해 전시에서 다시 전통 회화를 선택했다. 기법은 구상에 극사실적이고, 장르는 과거의 정물화에 가까운데, 제목은 <홀마크 프로젝트>이다. 이미지는 매력적이다. 등장하는 모든 인물과 사물은 하나같이 과하게 예쁘다. 표현은 매우 산뜻하며 꿈속에서 만난 듯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다. 전체 장면은 밝고 명랑한데다가 낭만적인 감성적 문구가 연상된다. 이런 모든 것이 존재하는 것, 홀마크 카드다. 실체의 부재를 전제한 시뮬라크라의 세계를 정의한 도식처럼, 모든 이미지들은 지극히 가상적이지만, 그 허구적 현실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기쁨, 웃음과 편안을 제공한다.
홀마크 카드는 미국이라는 국가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디즈니랜드로 대표되는 꿈과 환상의 나라, 그곳의 가장 좋은 것들을 모은, 따뜻하고, 유쾌하고, 풍성하고, 부유한 것을 야심차게도 작은 종이 안에 응집시킨 것이 바로 이 카드이다. 희노애락의 감정이 표현되고 있을 뿐 아니라, 작은 삶의 지혜까지도 담아낸다.
그렇다면 일상적 소모품의 하나인 홀마크 카드 프로젝트에서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작가는 아름다운 해질녘의 바다가와 붉은 색 꽃들을 마치 콜라주 하듯 조각조각 이어 그렸다. 거기에다 웃는 스마일 표시부터 잠자는 숲속의 공주, 미키마우스 등의 디즈니의 인기 캐릭터도 군데군데 삽입했다. 생일을 축하하는 풍선들과 고깔모자, 케익, 날개 단 아기천사 푸티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은 결혼식의 장엄한 분위기이자 탄생할 2세에 대한 기대이다. 카드의 내용은 한결 같이 삶의 희망과 부요를 기원하고 있고 서구의 전통적인 장르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21세기 장르화는 우리가 바라는 행복과 풍부의 도상들로 채워져 있다.
작가는 결혼, 생일, 축하, 감사, 위로, 크리스마스 등을 주제로 정하고, 해당되는 카드의 대표적 이미지들을 모아서 한 프레임 안에 담았다. 그런데, 이런 기쁨, 즐거움, 위로와 환영에 대한 감정은 정소연의 작품에서 잘 느껴지지 않는다.
매우 사실적인 화면의 치밀한 표현 뒤로, 조각 조각 들어있는 파스텔 톤의 하트들과 신데렐라의 춤추는 모습 안에 이상하게 어떠한 감정의 터치도 보이지 않는다. 기분 좋게 만드는 요소들 안에 스며드는 공허함과 비어있음은 너무 많은 기호들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이런 설명되지 않는 등식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카드 안 이미지의 공세에 우리는 때때로 기쁨과 슬픔을 느낀다. 그러나 그 흥분 뒤에는 결국 허무함이 전제된다. 강력한 이미지의 창고 앞에서 어떠한 감정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것과 같다. 강력한 이미지의 총합은 정소연의 작품에서 무로 변화할 때 까지 후퇴하면서 어떠한 감성적 호소도 상실하게 되는 듯 하다. 결국 가상의 황홀한 세계는 홀마크를 그려낸 회화작품 안에서 관객과 완전히 분리되고, 가시화된 허영의 실체는 허무함만 남기고 사라져버린다.
쏟아놓은 홀마크의 심벌들, 아름다운 이미지들의 여러 장면은 대중 매체에서 매일 양산되는 이미지들의 대량살포와도 같다. 수적 풍부가 어떠한 방식으로도 우리의 마음과 감정을 변화시킬 수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작가는 스펙타클과 센세이션의 시대에 미술의 자기 방어를 보여준다. 회화가 타매체에 대해 할 수 있는 작은 저항이기도 하다. 그 방식은 매우 동시대적으로 복합적이고 이질적이고 다양하지만, 장르화처럼 결국 표면 뒤로 허무함을 숨긴채, 시간의 힘을 강조하고 있다.

정소연은 매체의 성격, 표현 방식을 탐구함으로써 작품을 제작하는 방식을 견지해왔다. 그에게 회화는 홀마크의 카드처럼 감각적이고도 정서적인 이미지들을 끊임없이 생산해왔지만, 그것의 역사를 통해 발견하게 되는 것은 결국 비어버린 기호의 ‘무(nothing)’로의 치환이다. 아무것도 담보하지 않는 상태의 이미지들이 허무함을 넘어선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데에는 또 다른 시간이 필요할 듯 하다.